극단 성북동비둘기, 메디아 온 미디어,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1.3

이따금 고전 비극의 대사들을 되새겨 보노라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넘어 여전히 우리를 강렬하게 건드리는 그 말들의 힘 앞에 모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때 그 강렬함은 단순히 적나라한 말의 표면이 아닌, 그 말을 내뱉는 사람들의 내면, 다시 말해 그들의 처절한 밑바닥과 연관한 강렬함이다. 그리하여 그와 동일한 밑바닥을 지닌 우리는 그들을 알아보고 이해하며 뿌리 깊게 공감한다. 그런 맥락에서 에우리피데스의 메디아는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도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 그런데 김현탁의 연출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메디아(MEDIA)의 이름 속에 도사리고 있는 미디어(media)의 함의를 발견한다. 그에 따르면 메디아의 이야기는 오늘날 넘치는 미디어 속에 만연한 숱한 이야기들 자체이며, 메디아는 우리 속에 이미 스며들어 끝없이 삶을 침투하는 미디어라는 지긋지긋한 벗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무료하게 채널을 돌릴 때마다 어떤 형식의 프로그램 속에서든 우리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는 것이며, 요컨대 그 채널들의 밑바닥에는 사실상 그녀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가 겪는 치정과 능욕과 분노와 부추김과 복수와 죽음, 해소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 또 그 모든 일들이 과연 실제로 존재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저 웃음들과 노래들 뿐. 그리고 결국 거기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것이다.

지하 극장의 콘크리트 무대에는 흰 사각형 플로어가 깔려있고, 그 프레임을 가감 없이 노출시키는 대여섯 개의 형광등 불빛이 조명의 전부이다. 프레임 바깥에는 의상과 소품들이 준비되어 있으며, 한쪽에 설치된 작은 음향 데스크에서 실시간으로 효과음이 삽입된다. 마치 어떤 TV 채널의 보이지 않는 외부가 모종의 비현실성 속에서 한꺼번에 관망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열려진 채널(channel-통로)을 통해, 고전 메디아의 장면들은 각종 미디어 프로그램으로 변환된다. 가령 메디아가 코러스들 앞에 나와 자신의 처지를 토로하는 장면은 어느 여배우의 기자회견으로, 추방을 명하는 크레온에게 그녀가 하루의 말미를 호소하는 장면은 초기 유성영화의 이별 장면으로 나타나고, 또 이아손과 메디아의 다툼은 인신공격과 폭력으로 갈무리되는 리얼 토크쇼의 형식 속에 이루어진다. 나아가 장면들 사이에서는 옷을 갈아입거나 물을 마시는 실제 배우의 모습이 노출됨으로써 근본적으로 허상일 뿐인 미디어의 본모습이 지속적으로 폭로된다. 또한 때에 따라 신문기자, 촬영스텝, 게임 캐릭터 등으로 등장하는 코러스들 역시 고대 비극에서처럼 단지 극을 뒷받침하거나 의미를 생성시킬 뿐 아니라 그 흐름을 차단하고 미디어의 허구성과 작위성을 고발하는 역할들을 함께 담당한다. 따라서 각 인물들의 입지는 마치 오늘날의 미디어 속에서 끝없이 분사되는 파편들처럼 지극히 다층적이고 다면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 연극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배우에게 매우 큰 몫을 요구한다. 가령 유성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메디아는 그 통속적이고 전형적인 말투와 몸짓 속에서 애틋한 이별의 아픔도 자아내야 하지만, 그와 같은 미디어의 형식적 특성에 함몰되지 않은 채 여전히 복수의 칼날을 숨기고 가련함을 가장하여 크레온에게 호소하는 메디아 자신이기도 해야 했으며, 그러면서도 동시에 매순간 거리를 취함으로써 껍데기뿐인 미디어 속 인물을 폭로하기도 해야 했다. 한편 망설임 끝에 아이들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메디아는 만화 캐릭터 가면을 쓰고 더빙을 하는 성우로서 등장하는데, 그토록 순진무구한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능청스러움은 이 연극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각종 거리두기 장치들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메디아 역의 배우는 매 장면마다 요구되는 긴장과 이완 사이의 이 같은 줄다리기를 제법 잘 완수해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타의 배역들이나 코러스들에게서도 그와 같은 유연함이 보다 다채롭게 발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예컨대 기자회견 장면에서 메디아를 부추기고 언론의 힘으로 스토리를 조장하려는 기자들의 쑥덕거림이나 무성영화 촬영장에서 빗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하면서 흥분하여 개입하는 스태프들의 외침은 보다 분명한 태도의 인식을 통해 훨씬 더 풍성한 함의를 지닌 것으로서 전달되어야 했다. 같은 맥락에서 크레온과 이아손의 연기 역시 너무도 단편적이었는데, 그처럼 단순한 겉치레는 작품 전체의 주제를 희석시킬 위험마저 지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면 바로 그 작품 전체의 주제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히 미디어 속에서 메디아를 찾을 수 있다거나 혹은 그 반대가 가능하다는 어떤 기발한 발견 정도로 축소되어버릴 뿐인가? 물론 단지 그것뿐이라 해도 족할 정도로 매 장면의 형식적 완성도 및 원작과의 맞물림, 그 정합성은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 충분히 흥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와 같은 컨셉의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연극은 미디어의 다양한 양상 속에 숨어 있는 각종 폭력성을 고발하며, 이때 그 폭력성은 곧 메디아의 폭력성으로 귀결되는 동시에, 폭력을 당하는 메디아라는 또 다른 심급마저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그에 따라 관객 역시 자신의 다층적인 입지를 인식하여, 미디어가 무엇이고 메디아가 누구인지에 대해 끝없이 자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도 새로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누구인가, 코러스인가? 다시 말해 미디어의 관망자인 저 무서운 대중인가? 혹은 미디어인 메디아, 그녀 자신인가? 혹은 그녀가 부르는 노래이거나, 최후에 남은, 접근이 차단된 죽은 물신들인가? 실제로 미디어의 홍수 속에 흘러가고 잊혀지는 모든 사건들과 사람들에 대한 한 노래를 끝으로 마지막 채널인 가요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면, 무대 위에는 흩뿌려진 종이 가루들과 함께 목이 잘리고 피가 묻은 인형들, 메디아의 핸드백, 이아손의 모자, 총, 칼 등이 널리고, 그 전면에는 출입금지 테이프가 둘러쳐진다. 그처럼 황량한 풍경을 뒤로하고 다시 공연 전체에 대해 박수를 보낼 겨를도 없이 자리를 뜨면서, 관객들은 그 잔해들의 잔영에 머물며, 미디어가 모두 꺼진 후에 과연 남는 것은 무엇인지, 혹은 보다 근원적으로 무엇이 실체이고 무엇이 매체인지에 대해 고민하며 당혹감을 느낀다.

그러나 작품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관객들이 지속적으로 그와 같은 비판적인 고찰을 이끌어가기에는 이 연극은 너무도 현란하고 또 재미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따금 각 장면이 숨기고 있는 여러 함의들이 날카롭게 인식을 작동시키기도 했지만, 오늘날 미디어의 여러 폐단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여전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심각하게 사유하기보다는 그저 매 장면에 흠뻑 빠져 웃거나 즐기기를 선택하기가 더 용이해 보인다. 요컨대 여기서 관객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이중적이지만, 그 선택은 자유로운 몫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이중적인 태도 및 선택의 문제는 이제 관객으로부터 연극 자체에게로 넘겨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이 스스로의 위치나 태도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이 연극의 위치나 태도에 대해서도 많은 의문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이 연극은 각종 비판의 요소들을 은폐하고 우리를 현혹하는 저 미디어 자체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현란하게 유혹하다가 여지없이 자신에게 빠져들고 마는 관객의 뒤통수를 침으로써, 요컨대 스스로 미디어가 됨으로써 미디어를 비판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끊임없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연극이라는 또 다른 미디어’의 자리에 고유하게 남아있는가? 바로 이와 같은 두터운 의문들이 이 연극의 유쾌함 속에는 깊이 감춰져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다음의 물음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예견되었던 오늘날의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연극이라는 미디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연극이라는 미디어가 갖는 힘은, 다름 아닌 이 질문 자체를 발생시키는 그것의 가능성에 놓여있는 듯하다. 말하자면 각종 의미의 비규정성과 태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기인하는 끝없는 거리두기, 그 다채로움 속에 바로 연극의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현탁의 연출은 바로 그 다채로움을 맞닥뜨리게 함으로써, 단순한 해체나 실험 또는 하나의 컨셉에 머무르지 않고, 역설적으로 그 어떤 미디어 테크놀로지도 사용하지 않은 채 우리로 하여금 연극이라는 미디어 자체를, 그 찬연한 스펙트럼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그 실체를 뒤로한 채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결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 메시지들을 던져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일말의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매순간 그 다채로움을 내비치거나 숨겨버릴 수 있는 저 연기의 유연함과 연관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연극이라는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미디어는 바로 배우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서울연극 제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