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3월의 눈, 백성희장민호극장, 2011.3
눈이라는 것은 본디 죄 없음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주홍빛 같은 죄가 십자가의 대속으로 흰 눈보다 더 희게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눈의 죄 없음은 그것의 흰 색깔로부터 연상된다기보다, 가만 가만히 하늘을 내려오는 하염없는 그 모양으로부터 더 잘 환기되는 것 같습니다. 내리는 눈은 하염(何念)많고 더러운 이 세상을 관계치 않습니다. 그저 무심하고 무상하게 아래로, 아래로 내릴 뿐이지요. 그런 눈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눈은 그저 내리고, 잠시 땅 위에 머물다가 사라질 뿐. 온다는 것과 간다는 것은 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연극은 ‘오다’와 ‘가다’의 연극입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아직 ‘봄이 채 오지도 않은’ 3월 어느 날 ‘봄날은 간다’를 흥얼거리며 등장하는 이순은 ‘오다’와 ‘가다’ 사이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어쩌면 모습도 없이 노래만 들리는 그 첫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이 이미 죽은 자임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렇듯 이순은 이미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입니다. (프랑스어로는 유령을 ‘다시 오는 자(revenant)’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여러 차례 오고 갑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때로는 장오의 애를 태우기도 하지만, ‘언제든지 다시 돌아오는 그녀’, ‘장오가 떠나간 뒤에도 그 집에 언제고 다시 와 있을 그녀’라는 심상은 장오에게 또 다른 위안입니다. 눈처럼 큰 위안이지요.
그런 장오와 이순의 집 역시도 ‘오다’와 ‘가다’의 심상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집에 사람들이 다녀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집 자체가 스스로 오고 간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한옥을 만들 때는 쇠못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나무를 다듬고 틀을 짠 뒤에 하나씩 끼워서 만들지요. 그와 같은 결구방식은 집이 해체될 때도 고스란히 활용됩니다. 그 때문에 장오의 집을 헐러 온 목수들은 집을 부수지 않습니다. 다만 오래된 집에 경의를 표하면서 조심스레 마룻장을 뜯어내지요. 그러면 그 마룻장들은 해체되어 어딘가로 가서 밥상도 되고 의자도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윤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살아감 역시 그처럼 수많은 가고 옴의 겹침으로 이루어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가없는 겹침에 대해 마음을 열 때, 숭고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숭고란 흔히 압도적으로 크고 거대한 무언가를 맞닥뜨렸을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일컫는 말인데요, 이때 중요한 것은 아름다운 대상을 보았을 때는 깨끗하고 단순한 쾌감만을 느끼게 되는 반면, 숭고한 대상 앞에서는 고통과 쾌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막막하고 가없는 무언가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뛰어넘는 저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의 교차. 바야흐로 어둠과 밝음의 공존입니다. 그늘진 빛이요, 빛이 가득한 그늘이지요. 이 연극에는 그와 같은 빛 그늘이 가득 어려 있으며, 그 빛 그늘은 사람의 ‘마음’과 결을 함께합니다.
가령 양말 바람으로 발목이 비틀린 채 힘없이 마루 끝에 앉은 장오는 이따금 해사하게 웃습니다. 그럴 때면 한옥 구석구석까지 빛이 스미거든요. 또 목수들이 찾아와 마룻장을 뜯어낼 때에도 장오는 그렇게 환히 고요합니다. 그는 가만히, 정말로 가만히 있을 뿐인지라 감히 그 마음의 깊이를 가늠할 길이 없습니다. 슬프다고 말하거나 슬픈 표정을 짓는 것보다 훨씬 큰 슬픔이 만져지지요. 이쯤 되면 장오도 장오지만 그 연기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사람의 깊이에 대한, 마음의 깊이에 대한 경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살아가는 동안 모두들 그 얼마나 많은 말 못할 슬픔들을 안고 가는지요. 그것들을 그럼에도 기어이 말하려 드는 것이 아니라, 말하지 않은 채 다만 그처럼 깊은 슬픔이 존재함만을 고요히 드러내는 것. 과히 대단한 내공일 뿐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이 극에서 요구하는 참된 숭고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헌데 여기서 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장오의 그 같은 무심함이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 뒤늦게 체득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순은 그를 ‘살겠다고 가시가 돋쳐 준치 같았던 영감’이라고 회상하지요. 무섭고, 불쌍했다고요. 그렇다면 그의 고요를 위해서는 반드시 고요 이전의 폭풍 같은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일까요. 그는 고집스럽고 칠흑 같았던 어둠을 모두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에게 꼭 맞는 빛 그늘을 얻었습니다. 요컨대 준치 같던 영감은 그토록 가시 돋친 생이 있었기에 마침내 이토록 평화로워지신 게지요. 그의 집처럼 말입니다. 그리하여 일꾼들과 관광객들이 나가고 이순마저 가버린 후 장오와 집만이 덩그러니 남는 순간이 오면, 무대에는 조용히 어둠이 내려앉습니다. 그늘이 어린 벽들, 잠잠한 고요. 그리고 집과 그는 이제 곧 분리되고 해체되며 흡수될 터입니다.
한편 이 극에서 이순은 단 두 번, “환하다”는 말을 합니다. 처음은 새로 바른 문종이를 보면서였고, 두 번째는 못다 짠 빨간 가디건을 입은 장오를 보면서였지요. “아유, 환하다.” 아마 이순에게도 장오와 집은 하나였던가 봅니다. 그래서 떠났다가 다시 온 자 이순은 머물다가 이제 곧 떠나는 집과 장오에게 환한 그늘을 가졌노라, 봄 같은 찬사를 보냅니다. 가고 옴의 자유 속에서 서로의 빛을 알아보는 그들은 참으로 죄가 없습니다. 앞서 이순은 울며 말했었지요. “우리 영돈이는 죄가 없어요. 눈처럼 죄가 없어요.” 준치처럼 살지 못했던 아들에 대해 잔뜩 가시가 돋쳤던 장오 역시 마지막 떠나는 길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착한 놈이라, 죄 없는 놈이라, 눈 녹듯이 간 걸 게여. 꽃 지듯이 간 걸 게여.”
사실 장오가 볼 때 사람이란 모두 나면서부터 죄를 지고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등바등 죄를 진 채 살아보려 몸부림치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했지요. 그러나 어느덧 가시가 다 빠져버린 그는, 곧 분해될 낡은 집 같은 그는 비로소 사람에게 혹 죄가 있을지라도 그들의 옴과 감 자체에는 죄가 없음을 인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을 ‘눈 녹고 꽃 지는 모양’에 기대어, 마치 ‘눈과 꽃의 오고 감’처럼 죄 없다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그리고 이제 떠나가는 장오의 뒷모습 너머로 조용한 눈발이 날립니다. 이순은 홀로 빈 집에 가만히 앉았고요. 한줌도 채 안 되는 그 여린 몸집 위에 환한 빛이 쏟아집니다. 극의 마지막에서 보게 되는 존재 자체의 그 환함은, ‘존재의 집’인 한옥을 두고 떠나가 버린 장오의 ‘비존재’와, 거기 있지만 이미 없는 이순의 ‘비존재’가 만남으로써 발생되었습니다. 오직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 오직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어둠이 가득한 빛.
금방 녹아버릴 3월의 눈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잠잠히 안기어 듭니다. 그리고 이제 그 모든 무심함과 담담함과 고요함은, 어느덧 가장 깊고 진실한 마음이 되어 관객의 마음에 내립니다. 이렇듯 어쩌면 이 극에서의 무심함은 가장 깊은 마음을 위한 것이었으며, 노배우들의 경탄할 만한 ‘연기하지 않는 연기’는 가장 참된 연기를 위한 것에 다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단지 침묵하기 위하여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말보다 깊은 말을 위하여, 외침보다 깊은 호명을 위하여 침묵이 발생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침묵과 무심함으로 유희하는 참된 연극이 그간 그 얼마나 그리웠던지요. 침묵과 무심함 속에 숨겨져 있는 말과 유심함의 찬연한 스펙트럼으로 하여 가슴 뛰고 싶은 것, 그 소망이야말로 연극을 지탱시키는 힘이 아니던가요.
그 소망과 숭고함에 젖어들어 마냥 고요해지고 싶은 이 때에, 그러나 문득 장오의 대사가 귓등을 때리고 지나갑니다. “이제 다 끝났어. 끝은 끝이야. 세상에 좋은 끝은 없어…”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죽음이라는 것이 눈처럼 아름다워도, 분해되어 멀리 가서 새 삶을 얻는 집처럼 숭고해도, 아무리 괜찮아도, 끝은 끝일 뿐. 그리하여 실제로는 그들처럼 무심해지지도 괜찮아지지도 못한 채, 이렇게 또 다시 두려워지는 것을? 죽음이라는 것이. 세상의 모든 끝이. 비록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여도 말입니다. 그러니 달리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황씨처럼 마룻장 밑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요. 가만히, 그러나 간절하게. 죽임 당한 돼지 떼의 말없는 울음을 안고.
계간 연극 제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