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푸른 원피스를 입은 리델이 뚜벅뚜벅 무대로 걸어 나온다. 푸른 의자에 앉아 잠시 목을 축이고. 긴 치맛자락을 걷어 허벅지를 드러낸 채 지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투우사에게 필요한 건 두…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전혀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글을. 그 충동을 따르지 못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박사…
남은 생 동안 매일 밤,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먼 도로에서 전복된 자동차의 흩어진 부품 사이, 영영 모를 타인의 아픔 어두운 구석에 앉아, 어떻게 모든…
프랑수아즈 : 너는 클레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의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렌 : 난 할 거야, 그래야 하니까.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건 진실이 알려져야 하기…
저는 지금 창경궁이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 있습니다. 깊은 밤 궁은 짐승처럼 캄캄해요. 날이 밝아오면 내일은 대온실에 가볼 예정입니다. 그곳을 거닐며 제가 무엇을 생각할지는 자명해요. 언제부터 이토록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김연수의 단편 에는 몸에 새겨진 먼 감각의 기억, 곧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결코…
언젠가 좋다, 와 좋아하다, 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습니다. 가치판단의 세 측면인 객관주의, 주관주의, 객관적 상대주의 개념들과 이를 연관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엄마 아빠는 저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미처 녹음기를 챙기지 못했던 어느 여행길에 산통이 시작된 바람에 제가 세상에 나던 첫 순간은 기록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후에…
눈 수술을 했습니다. 저 좋자고, 잘 보이자고 한 다분히 사치스런 수술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눈이 나쁜 것도 몸이 아픈 것이니 얼마만큼은 아픈 소리를 내봐도 되겠는지요. 실제로 각막이 덜 붙었다…
생각해보면 축제의 이름 앞에는 대개 지역명이 붙습니다. 가끔 ‘젊은’ 류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변방’ 같은 추상적 공간이 수식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방곡곡 지역의 이름들은…
Max Beckmann, Carnival, 1943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에 따르면, 중세나 르네상스의 카니발은 엄숙한 지배 문화를 유쾌하게 희화화하여 전복적인 파괴 및 창조적인 생성 양자를 풍성하게 발생시켰던 민중들의 축제였습니다. 애초에 고대…
가령 이런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순간, 타자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어깨 너머 배트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수비수들과 주자들은 두 다리 가득 무게를 실어 다음 순간의…
버거운 시기입니다. 모두들 가난합니다. 하물며 예술가들이야. 사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가난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천재론을 능가하는 예술가 가난론이 등장해야 할 판입니다. ‘예술가란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에 의존하는 천재’라는…
김광석은 내가 5집을 미친 듯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에 그만 죽어버렸다. 그해에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학업 성적이 우스웠으므로 취직 따위는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청춘이 끝나버릴…
탄츠테아터의 장을 열었던 독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는 사람의 몸을 움직여 춤추게 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라는 1978년 안무작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무대화했습니다. 65세 이상의…
마뜨료쉬까라고 했다. 몇 해 전 긴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둥근 나무 인형을 내밀며 뱉은 그 이국의 발음이 유달리 귓가에 맴도는 밤이 있다. 팔도 다리도 없이 얼굴과 몸통으로만 이루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