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전혀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글을. 그 충동을 따르지 못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박사…

세 번째 날들

학생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어떤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오는지, 어떤 꾸벅임으로 조는지, 어떤 필기구를 사용하는지, 어떤 눈빛으로 경청하는지, 어떤 몸짓으로 질문하는지, 다가오는지, 푸르른지. 그것을 볼 수 없으니 다른 것들을…

버드나무

김문석 ‘우연의 정원’ 영상을 위한 나레이션 (2019년 12월) 생이 고단할 때면 만났던 식물들과 만나게 될 식물들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집이 될 수는 없어도 몇 잎의 푸름들에게 집을 내어줄 수…

갈라놓인 우리를 이어주는 것들

임흥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을 위한 글 © 임흥순 풍경 일렁이는 강물, 노을진 산등성이, 내려앉는 밤, 낮의 산허리 위를 지나가는 구름들의 빠른…

우주적(宇宙的) 식사

이서재 전시 ‘우주적 _ 宇宙的’ 을 위한 에세이 (2019년 10월) 천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우주를 떠올리면, 그것은 나의 아득한 바깥 같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그려보면서도 그 까마득한 거리에 압도당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더운 여름이었다. 9년 전이었다. 아비뇽 연극제에서 프랑스 연출가 알랭 티마르와 한국 배우들이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를 올린 해였다. 상징적인 무대와 간결한 각색, 라이브로 더해지는 한국적인 타악 연주는 이미 원작에 익숙한…

2019년 봄, 글들

하여 café 라는 말을 입 속에 굴려보노라면 많은 풍경들이 내게 밀려온다.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봉지를 붓고 두어 번 휘 저어 마시다가 끝에 가서 만나는 달콤한 농축. 좁고 동그란…

7번국도

남은 생 동안 매일 밤,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먼 도로에서 전복된 자동차의 흩어진 부품 사이, 영영 모를 타인의 아픔 어두운 구석에 앉아, 어떻게 모든…

조금 덜 슬픈 이별 – 남산동 A의 집

2016년 12월 28일 대한민국 경주 남산동의 기와를 올린 양옥 A의 집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같은 시기 한국에 다니러 온 한 친구는 벌써 여러 달 전부터 부산에 놀러오마고, 거기서 만나자고…

조금 덜 슬픈 이별 – 아현동 M의 집

2016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아현동의 연립주택 1층 M의 집 7살 겨울에 이사를 와 32살 겨울까지를 꽉 채워 살았다. 그보다 앞서 몇 년 간 네 식구는 같은 동네에…

조금 덜 슬픈 이별

꿈을 꾸었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가버린 아주 짧은 꿈. 오래 잊고 있던 한 장소가 생경한 얼굴로 꿈에 나왔다. 여전한 잠결에 깨어 그곳이 어디였나 더듬어보니, 큰아버지댁 안방에 달린 화장실이었다….

연극을 끝까지 보기 위하여

프랑수아즈 : 너는 클레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의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렌 : 난 할 거야, 그래야 하니까.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건 진실이 알려져야 하기…

김동현 선생님께

저는 지금 창경궁이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 있습니다. 깊은 밤 궁은 짐승처럼 캄캄해요. 날이 밝아오면 내일은 대온실에 가볼 예정입니다. 그곳을 거닐며 제가 무엇을 생각할지는 자명해요. 언제부터 이토록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집으로 돌아간 사람

이서재 ‘집전’ 에세이 (2017년 9월) 빈 집, 빈 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가 익숙한 것, 사랑하던 것,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아끼던 공기는 이토록 차갑고, 숨쉴 수 없는…

신데렐라, 재를 털어주는 이름

조엘 뽐므라(Joël Pommerat)의 희곡 신데렐라(Cendrillon)의 한 장면에 부쳐 때로 어떤 희곡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익명으로 존재한다. 또 때로 그 익명의 존재들은 이름을 가진 이들보다 쉬이 식별되고 기억된다. 말하자면 책장을…

창작에 대하여 (2014년 5월)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작품 중 하나가 루마니아 연출가 실비우 퓨카레테(Silviu Purcarete)의 2009년 작 와 심각하게 흡사하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물론 전해진 것들은 실체 없는 풍문들에 불과하다. 몇몇…

가곡 실격

파리에는 백년만의 장마가 찾아왔다. 열흘 가량을 쉬지 않고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강가의 산책로로 내려가는 계단이 물에 잠겼고, 나무들은 수면 위로 겨우 지켜낸 잎새들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누런 흙탕물이 코앞에서…

국민 사직

리옹 구시가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생쥐스트 대성당에는 때마침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졌다. 그 주일의 미사는 2차대전 승전기념일에 부쳐, 전쟁 중 사라져간 이들을 위한 추모를 겸하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왼…

좀녜

김흥구, 좀녜, 2014 루나포토페스티벌 – 달과 사진의 밤 (Lunar Photo Night) 벗어 널어놓은 잠수복들이 처녀 적 몸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쭈글쭈글한 살결을 곁에서 함께 말렸다. 닳아 해어진 살이…

사라짐을 딛고 쓰다 – 공연예술비평에 대하여

김연수의 단편 에는 몸에 새겨진 먼 감각의 기억, 곧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결코…

문화로서의 자전거

1. 망각의 전략 지난 여름, 부다페스트의 시나고그에서 무료 가이드를 해주던 한 유태인은 말했다. 헝가리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를 잊었노라고. 오늘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기념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심지어 그게 무엇인지조차…

욕망과 두려움 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 온 아이

삶이 아주 지치고 힘들고 외롭게 지속되던 그 언젠가, 아파트 단지로 난 길을 걷다가 투닥거리며 걸어가는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을 마주친다. 그 연극 속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삶으로부터 도망하여 그저…

좋은 예술

언젠가 좋다, 와 좋아하다, 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습니다. 가치판단의 세 측면인 객관주의, 주관주의, 객관적 상대주의 개념들과 이를 연관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예술가의 목소리

엄마 아빠는 저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미처 녹음기를 챙기지 못했던 어느 여행길에 산통이 시작된 바람에 제가 세상에 나던 첫 순간은 기록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후에…

예술가의 육체

눈 수술을 했습니다. 저 좋자고, 잘 보이자고 한 다분히 사치스런 수술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눈이 나쁜 것도 몸이 아픈 것이니 얼마만큼은 아픈 소리를 내봐도 되겠는지요. 실제로 각막이 덜 붙었다…

축제의 지역성

생각해보면 축제의 이름 앞에는 대개 지역명이 붙습니다. 가끔 ‘젊은’ 류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변방’ 같은 추상적 공간이 수식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방곡곡 지역의 이름들은…

축제의 축제성

Max Beckmann, Carnival, 1943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에 따르면, 중세나 르네상스의 카니발은 엄숙한 지배 문화를 유쾌하게 희화화하여 전복적인 파괴 및 창조적인 생성 양자를 풍성하게 발생시켰던 민중들의 축제였습니다. 애초에 고대…

야구와 연극

가령 이런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순간, 타자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어깨 너머 배트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수비수들과 주자들은 두 다리 가득 무게를 실어 다음 순간의…

마음의 가난

버거운 시기입니다. 모두들 가난합니다. 하물며 예술가들이야. 사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가난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천재론을 능가하는 예술가 가난론이 등장해야 할 판입니다. ‘예술가란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에 의존하는 천재’라는…

청춘(靑春)에게 보내는 시(時)

김광석은 내가 5집을 미친 듯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에 그만 죽어버렸다. 그해에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학업 성적이 우스웠으므로 취직 따위는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청춘이 끝나버릴…

예술(人)과 일반(人), 그 아슬아슬한 유희를 위하여

탄츠테아터의 장을 열었던 독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는 사람의 몸을 움직여 춤추게 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라는 1978년 안무작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무대화했습니다. 65세 이상의…

흑백사진

마뜨료쉬까라고 했다. 몇 해 전 긴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둥근 나무 인형을 내밀며 뱉은 그 이국의 발음이 유달리 귓가에 맴도는 밤이 있다. 팔도 다리도 없이 얼굴과 몸통으로만 이루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