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성북동비둘기, 혈맥,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1.1
1947년과 2011년, 공교롭게도 같은 성북동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지하/땅굴이며, 공교롭게도 같이 흘러가는 처지. 그렇다면 원작과 이번 연극 사이의 차별성은 고작 시간적인 차원에서밖에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물론 ‘고작’이라는 수식어를 이렇게 함부로 갖다 붙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혹 삶이나 죽음으로부터 거리를 취할 수 있다고 한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저 시간이라는 유일한 실체 역시 부질없고 무심한, 그저 가볍게 들어 올려 버린다 해도 실상 아무것도 달라질 것 없는 낡은 장식품에 불과하지는 않겠는가. 고전의 탁월한 재구성으로 정평이 나 있는 김현탁의 연출은 언제나 그 장식품을 떼어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가 그렇듯 시간이라는 것을 무심히 무화시킬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 시간을 가로지르고 있는 우리네 삶과 죽음에 대해서조차 같은 무심함으로 거리를 취할 수 있는 그의 가난하고 진실한 시선 덕택일 것이다.
지하 대기실의 차가운 정류소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공연장의 문이 열리자 우르르 버스에 오른다.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혈맥’ 버스 곳곳에 자리를 잡은 채 그들은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몸속의 가는 혈관들을 타고 가듯 끝없이 덜컹거렸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자기 몸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것처럼 버스를 오르고 내리는 극중의 인물들을 구경한다. 그 인물들은 1947년의 희곡에서와 똑같이 지난한 삶을 살고 있지만, 땅굴이라는 현실적 배경을 벗어나 2011년의 버스 안에 자리한 무심한 사람들 가운데에서 어느덧 그 절절한 부대낌을 상실해버린 퇴색한 모습이다. 그들은 시끄럽게 자신의 불행을 떠벌리는 어느 목청 큰 아저씨가, 두 손으로 성경책을 부여잡고 연신 중얼거리는 수상한 아줌마가, 모든 이의 말과 노래에 대꾸하고 반응하는 미친 여자가, 현실의 부정을 고발하거나 자신의 이념을 강요하거나 하루의 돈벌이에 급급해 값싼 웃음을 흩뿌리거나 사랑의 실랑이를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군상들이 되어, 버스를 타고 내리듯 관객들의 혈맥을 끊임없이 타고 내렸다. 같은 공간 속에 함께 있으면서도 반대 편 창밖을 내다보며 외따로 대화하고, 지척에 있으면서도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수화기 너머의 사람에게 하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희곡에서와는 달리 가족이나 이웃이라는 단단한 연대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의 익명에 가깝게 존재한다. 이따금 그 이름들이 호명되긴 하지만 각각의 이름에 합당한 인물들의 정체성이 연극 자체로부터 친절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난무하는 것은 시선을 사로잡는 의상들과 신경을 건드리는 외침들 뿐, 인물들은 듬성듬성 잘려나가고 짜깁기된 전체 스토리처럼 도처에 널브러지기만 한다. 그렇다면 거기 앉은 관객들은 그런 그들을 그저 목도하기만 하면 되었던 것일까? 그들처럼 익명으로서?
그러나 도리어 이 극이 택한 그와 같은 익명의 전략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인물들의 이름을 찾아내도록 부추긴다. 연출가의 해체적 성향을 익히 알아 원작 희곡을 미리 숙지하고 간 필자와 같은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들의 이름을 맞히는 즐거움에 쉽사리 매혹되었으리라. 으레 희곡을 읽는다는 것은 원문 사이사이에서 발길을 멈추고 앞장의 인물 설명을 들추어 끝없는 대조를 일삼으면서, 이를 통해 아직 얼굴도 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이름을 외고 또 그 이름 속에서 그들의 삶을 떠올려보고자 하는 경미하나마 필사적인 노력을 들이게 되는 일이지 않던가. 버스에 앉은 몇몇 관객들은 그 노력의 덕택으로 그곳을 무수히 오르고 내리는 저 인물들을 향하여 이따금 뜨겁게 그 이름을 불러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저 이가 털보로구나. 네가 거북이이고. 복순이가 우네. 옥매 옷 참 곱기도 하지… 그리고 이름을 되찾은 인물들은 자신을 호명하는 이들에게 은밀히 다가와 한 순간 그 혈맥을 시원스레 통과해 가는 붉디붉은 꽃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비로소 저마다의 꽃 같은 삶을 획득함으로써 박탈당했던 긴 시간을 기어이 되찾고 말았다. 따라서 이 공연을 보는 동안 관객들이 행하게 되는 유심한 관찰은 단순한 인물 알아맞히기에 머물지 않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삶의 진실을 거리낌 없이 다시 껴안는 모종의 해후들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요컨대 인물들의 삶에 대해서 연출이 취하고 있는 거리는 그것에 대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친밀감을 내포한다. 도리어 그는 그들을 가장 잘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인물들로부터 거리를 취했고 그들에게서 언어를 박탈했던 것이다. 고전의 재창조에 대한 김현탁의 탁월함은 말을 아끼는 데 있어서의 탁월함으로 연결된다. 그와 같은 절제는 분명 연출가로서 감히 감당하기 어려운 차원의 일이다. 그러나 그의 대담함은 배우나 관객들로 하여금 인물의 이야기나 전언에 휘둘리기보다 그저 서로의 응시를 교환하는 가운데 참되고 내밀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연극의 무대가 버스로 형상화된 점은 의미심장하다. 버스를 타고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고 서로에게 무심하지만, 이따금 작은 호기심으로 저마다를 일별하기도 한다. 또 실제 버스에서처럼 여러 각도로 배치된 무대 위의 좌석 탓으로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관객들의 시야는 달라지고 제한된다. 말하자면 말을 버린 배우들의 표정이나 몸짓이 버스 위의 모든 관객에게 온전히 가 닿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 곳에서 옥매는 복순이를 찾아달라고 울면서 ‘지금 모습으로 찾습니다’ 라고 적힌 전단지를 내민다. 전단지에는 사라진 사람의 실종 당시 모습과 여러 기술을 조합해 만든 현재 그의 몽타주가 함께 실려 있다. 그러나 과거의 사진도, 현재의 몽타주도 진실 자체가 될 수는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전단지를 내밀며 눈물 콧물을 쏟는 옥매의 얼굴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것뿐이다. 진실은 그 곳에밖에는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버스 안에 진실은 있다.
버스 안의 진실은 예기치 못한 인물의 행위나 각종 오브제를 통해 지속적으로 형상화된다. 어머니는 인디언 인형 차림으로 버스에 올라타 기타를 치면서 동기간의 반목에 대한 슬픔을 무심히 노래한다. 곱디고운 한복 차림의 미친 여자 옥매는 복순이에게 가르치던 구성진 노래를 중단하고 어머니의 가락에 맞춰 손을 까딱거린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털보 역시 발을 흔들며 박자를 맞추고 있다. 그들 모두는 노랫말의 내용을 무화시키면서도 가장 강렬한 방식으로 그 의미를 전달했고, 감정 없는 아름다운 이미지만을 통해서 가장 깊고 슬픈 진실을 표현하였다. 이밖에 억울한 죽음들을 고발하는 원칠이와 CD를 팔러 온 원팔이의 대립 구도, 우연히 작동된 CD 플레이어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맞춰 격렬하게 부딪는 그들의 몸싸움, 술 취한 옥희의 어깨에 원칠이가 둘러주는 붉은 깃발, 그리 서 있지 말고 들어오라며 버스 위로 조심스레 털보가 인도한 강아지 인형/청진계집(!), 결단력 없는 거북이에게 복순이가 버리고 간 꽃, 그 꽃을 품에 안으며 복순이에게 노래를 가르치려던 옥매 등 끊임없는 형상들의 뒤엉킴은 버스를 타고 가는 무심한 관객들의 시선을 쉴 틈 없이 잡아끌었고, 그 속에는 이미지 보다 깊은 그들 삶의 참된 모습들이 의뭉스레 도사리고 있었다. 그로써 ‘지금 모습으로’ 우리는 그들을 찾는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하나 둘씩 올라탔던 그들은 잠깐의 일별을 뒤로 하고 그렇게 차례로 다시 버스에서 내린다. 그렇다면 한씨의 파인애플/화염병과 함께 덩그라니 남은 최후의 관객들은 이제는 호명할 이름도 없이,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인가. 땅굴 속의 인물들처럼 우리 모두는 같은 공간 속에 있지만(inn)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dividual), 이미 독립은 이루어졌으나 여전히 독립을 꿈꾸고, 모두 함께 그 땅굴을 빠져나와야 하지만(inn) 살아가기 위하여 뿔뿔이 혼자이다(dividual).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는 간다. 각자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종착역에 닿기 전에 저마다 행선지를 찾아 내려야겠지만, 인물들이 모두 떠나간 후에도 관객들의 여행은 정처 없다. 인물들은 알아봐지고 호명되었으나 우리에겐 이름이 없고, 그들과 달리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지금 모습’을 노래로도, 외침으로도, 이미지로도 채 형상화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정작 우리는 시간과 말을 박탈당한 채 저 혈관 속을 덜컹거리면서, 여기 버스 위에 앉아있다. 옥매의 외침처럼 어쩌면 그렇게 영원히 우리는, 저 땅굴을 면치 못하리라.
뷰즈 2011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