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아현동의 연립주택 1층 M의 집

7살 겨울에 이사를 와 32살 겨울까지를 꽉 채워 살았다. 그보다 앞서 몇 년 간 네 식구는 같은 동네에 살던 M의 동갑내기 친구 집 방에 세를 들어 지냈었다. 젊은 부부와 두 아들 몫의 방 한 칸 짜리 짐은 어느 하루 이웃들의 손을 빌려 거뜬히 옮겨졌다. 비록 지척이었으나 몇 개의 골목 너머 형들과 어울려 놀던 공터는 어쩐지 다시는 걸음 못할 영역으로 선 그어졌다. 어딘가를 떠나온다는 것은 먼 시절에도 이미 그런 의미였었다. 그리하여 훗날 이 집을 떠나게 될 때 M의 부모님은 같은 이유로 오래 망설이실 것이었다. 그 날 어린 M은 낮은 눈높이로 오가는 이삿짐의 들고 내림을 구경하다가 친구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집 가까우니까 내일부터 많이 놀러 와. 그러나 정작 그 날 이후 25년이 넘도록 좀처럼 친구를 데려온 적은 없는 집이었다. 어머니는 M을 돌아보시며 아니, 내일부터는 아니라고 정정하셨다. 새 집에는 아직 살고 있는 이들이 있어, 짐만 옮겨둔 채로 네 식구는 동네 초입의 여인숙에서 두 달을 더 보내야 했다. 그 사이 M은 국민학교에 들어갔고, 어느 날 집이 어디인지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당당하게 손을 들고 우리 가족은 여인숙에 살고 있노라 답한 적이 있다고 했다. 태연하고 순진한 아이의 답변은 당시의 어머니를 부끄럽게 했다. 그러나 정작 M은 아무렇지 않았다. 이제 내년 봄이면 M의 가족은 25년을 보낸 이 집을 떠나게 될 것이다. 언젠가 사진으로 보고 남몰래 좋아했던 아현동 그 집이 사라질 것이 서글퍼 급히 만남을 청했다. 아쉽지 않으냐고, 내심 답을 정해둔 질문을 던졌을 때 M은 그 옛날의 초연함을 입고 또 한 번, 아무렇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기능성만을 두고 보았을 때는 아쉬움을 가질 이유가 하등 없는 집이었다. 특별히 부모님을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창문에는 뽁뽁이를 발라 놓아도 서늘한 웃풍이 들고, 방문했던 날처럼 해가 좋은 때조차 집안은 어두컴컴해 파리한 형광등에 의존해야 했다. 식탁을 둘러 의자를 놓고 앉을 공간은 협소했고, 미닫이문을 열고 신을 신고 나가야 하는 좁다란 복도형의 긴 부엌은 냉랭했다. 창에 붙은 시트지가 햇빛을 머금자 공간이 붉게 물들었다. 붉은 부엌의 맞은편에는 통돌이 세탁기가 놓여 있어, 그 차가운 바깥에서 어머니는 빨래도 하고 밥도 짓고 설거지도 하며 25년을 보내셨을 것이었다. 창문을 열면 옆집의 낮은 지붕 위로 버려진 화분들과 시들은 덩쿨들이 내다보였다. 좁은 현관의 신발장은 네 식구의 신발을 감당하지 못해, 연립주택 2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의 층계참에 신발장 하나를 따로 내어놓고 사용했다. 복도 창에는 각종 배달 번호 스티커들이 긁히고 해진 모양으로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때마침 노오란 겨울의 햇살이 스며, 신발장 옆 조용한 벽면 위로 네모난 스티커들의 무늬가 음영을 그려냈다. 말하자면 M의 집은 그처럼 허다한 바깥을 포함하는 공간이었다. 넉넉함으로 바깥을 품어 안는다기보다, 좁고 부족했기에 바깥을 끌어들여야 했던, 그 역사 속에서 반갑지 않은 냉기가 오랜 벗처럼 네 식구의 몸을 들락거렸을 것이었다. 집이란 것이 무릇 추위를 막아주고 바깥으로부터 보호해 은신하게 하는 기능을 1차적으로 가져야 하는 것이라면, M에게 있어 아현동 집은 집으로서는 한참 못미더운 곳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떠남에 있어 그다지 아쉬움이 남지 않았을지도. 그저 부모님이 하루 빨리 보다 안락한 곳에서 지내시길 바라는 마음이, 유구한 세월을 넘어 그 마음 하나가 남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부모님은 집을 떠나기를 못내 끝까지 망설이셨다. 기능성과 편의를 기준으로 볼 때는 제 구실을 못하는 공간일지 모르나, 그럼에도 그것이 집이었으므로. 그들만의 집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집이란 과연 무엇일까. M은 자문했다.

엄밀히 말해 이 집은 M의 집이 아니라고 M은 생각한다. 요컨대 그것은 M의 부모님의 집이다. 어른들 틈에 서 이삿짐의 이동을 응시하던 아이의 눈높이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높아졌고, 머리가 커지는 만큼 공간에 대한 데면데면의 역사도 깊어졌다. 말하자면 이제는 이 집과 관련된 무언가의 발생이나 이동을 가만히 응시할 일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세 개의 방 중 부모님의 방 옆에 달린 큰 방을 쓰던 M은 대학에 가자마자 왜인지 동생에게 미안해진 마음으로 제 방을 내어주었다. 현관 쪽 작은 방에 대한 동생의 오랜 불평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었지만, 하여 곧바로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었지만, 어차피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지 않았으므로 상관 없었다. 군대를 다녀왔고, 대학원에 가면서 송도에서 4년 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올해 초 기숙사 방을 빼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니 작은 방은 어머니의 서재가 되어 있었다. 자리를 깔고 누우면 M의 두 발은 긴 책상 아래 어둠 속으로 민망히 유배되었다. 송도로 출퇴근을 하며 차를 몰고 다니기 시작하자 또 다른 불편이 발견되었다. 좁은 골목에 겨우 주차하거나 한참을 후진으로 빠져나와야 하는 일이 잦았고,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마주 오는 마을버스를 만날까 매번 조바심이 났다.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시간을 뺏기거나 짜증을 삼켜야 하는 일이 버거웠다. 그러나 물론 이 동네만의 분명한 이점도 있었다. 교통의 요지에 있어 시내로의 접근성이 좋은 점, 서울의 중심에서 은밀하게 옛 정취를 간직하며 거주할 수 있는 점 등은 여전한 매혹이었다. 부모님은 특히 그로 인해 강서구의 아파트로 옮겨가기를 원치 않으셨다. 모든 불편을 끌어안고도 동네와 집을 버릴 수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M은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M 자신의 집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집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자꾸 같은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방문을 약속했던 날 M의 부모님은 자리를 비켜주셨다. 식탁에는 귤 한 접시가 놓여 있었고, M이 틀어두고 나온 아침방송 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아득한, 그들의 집이 서늘하면서도 따뜻했다. 착실하게 공학도의 길을 가고 있는 장성한 아들이 언젠가부터 달 사진을 찍더니, 급기야 달력이며 책을 만들어 판매를 한다면서 좁은 방에 박스를 가득 들이는 것을, 밤 새워 포장을 하느라 그 방에 내도록 불이 밝혀져 있었던 것을, 이번에는 또 어느 모르는 이를 들여 집을 사진 찍게 하고 그 어떤 글의 한낱 소재로 귀한 공간을 내어주는 것을, M의 부모님은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이셨을까. 겉으로야 물론, 담담하셨겠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 속 일렁임을 적당히 숨긴 채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잠시 함께 식탁에 앉았다가 각자 현관을 나서는, 말 없는 식구들. 언젠가 한 벗이 내게 말하기를, 저 무심함이야말로 한 가정의 완벽한 평화를 보증한다고 한 적이 있다. 예컨대 가족 중 누군가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하면 나머지 구성원이 각자의 삶에 전념하기가 힘들어지고, 고요하던 수평은 균형을 잃고 쏟아져 내린다. 그러므로 서로 마음껏 무심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평화의 증거가 된다. 평화롭게 집을 비워주신 부모님께서 냉장고 옆면에 붙여두신 M의 달 사진들을 나는 오래 바라보았다. 밤 늦게 송도에서 M의 차가 돌아올 때면 그 소리에 꼭 내다보신다는 어머니. 언젠가 한 번은 동네 초입에서 친구를 만나 잠시 말을 섞고 있는데, 차 소리가 들렸음에도 M이 오지 않자 밖으로 나와보신 어머니가 친구를 반기시며 커다란 과자 봉지와 음료 두 캔을 건네주고 가셨던 일. 멋쩍게 받아 들고 사거리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짧은 수다를 나눈 뒤 조용히 들어왔던 훌쩍 큰 아들. 말하자면 더 이상 여인숙에 살고 있노라고 손을 들고 커다랗게 말해 어머니를 무안 주지 않을. 지금도 현관의 신발장 위에는 연필깎기가, 화장실 문에는 낡은 스티커가, 베란다에는 수많은 우산들과 옷걸이들이 남아 있지만. 물건들과 흔적들이 쌓여가는 사이, 아이들이 커 가는 사이, 켜켜이 무뎌져 온 시간들. 그 천진하던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속으로 물으며 M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조금은 장난기 어린 선한 눈을 하고, 어른이 되어서, 그 아이는 여기에 있지. 그렇다면 이제는 또 다른 떠남을 도리어 부모님께 권유하는, 그 후로 다시 혼자가 될, 어른이 된 아이는 그 동안 어디에서 살았을까. 여기에서 살았지, 이 집에서. 정든 공간을 영영 떠나버리고, 다가올 인생의 새로운 매듭마다 어쩌면 또 수 차례 집을 옮겨가면서, 그 어떤 세월을 통과할지라도 누군가 M에게 너는 어디에서 살고 자랐느냐 묻는다면, 아현동 이 집에서 살았노라고, 그는 언제까지고 답할 것이다. 집이란 것이 과연 무엇일는지 비록 그 답은 알지 못해도, 저 질문에 대한 답변만큼은 이미 영원을 입었다. M은 이 집에서 살았다. 이 단 하나의, 영원한 문장을 기록하기 위해 나는 그 곳에 다녀왔던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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