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정민이는 8개월이었다. 겨울이었다. 그때까지 정민이는 부산집에서,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북적이는 사랑 속에 자랐다. 서울의 일상에 찌든 고모가 이따금 집으로 내려가면, 바닷가 집에서는 온통 뽀오얀 아기 비누냄새가 났다.

아빠가 돌아가신 뒤 오빠네 가족은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봄 여름이 지나고 추석이 왔다. 그새 돌을 지내고 훌쩍 커버린 정민이는 아직 말을 못했고 걸음마도 느렸지만, 부산집 현관을 보자마자 팔짝팔짝 좋아하며 소리를 질러 모두를 놀라게 했다. 거실에 내놓은 할아버지 사진에 대고 꾸벅 인사도 했다.

아직 문장화되기 이전의, 물질이자 몸이자 살이자 꿈인, 생경하고도 낯익은 감각 그 자체로서의 정민이만의 기억. 누구도 기웃거릴 수 없는 미지이지만, 어렴풋한 상상으로도 그 풍성함과 완전무결함이 한사코 의심되지 않는 거기 그 곳에,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풍경 속에, 어쩌면 그 때의 나도.

다시 갈 봄 여름이 지나, 정민이가 이제 말을 뗀 지도 퍽 오래되었다. 생각도 감정도 기억도 모두 그렇게, 말의 무덤 속으로 빨려들어가 버렸다. 하여 이제 나는 감히 그 아이가 엿보인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걸 무슨 말로 표현하는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빛나던 옛날은 아이 속의 빙하 아래 갇혀 버렸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야 여전히 살고 있겠지만. 먼 곳에서 아이가 어른의 몸짓을 흉내내며 사진 찍힐 때마다, 나는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