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흥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위한

things that do us part 3

© 임흥순

풍경

일렁이는 강물, 노을진 산등성이, 내려앉는 밤, 낮의 산허리 위를 지나가는 구름들의 빠른 그림자, 파란 하늘, 안개처럼 밀려와 앞을 가리는 구름, 까만 비, 겨울 숲, 까마득한 설경, 눈 위를 밟고 지나가는 검은 새, 바위 틈으로 녹아내리는 봄의 얼음들. 서사의 사이사이 스크린을 채우는 광막한 풍경들은 모든 말해질 수 없었던 이야기를 대신하여, 우리를 대신해 죽은 수만의 목숨들을 대신하여, 아득히 펼쳐진다. 그렇듯, 지워진 역사를 마주하는 방법은 역사의 고증 및 재현에 있지 않고, 그 뒤안의 풍경을 조용히 응시하게 하는 일에 놓인다. 임흥순은 언제나 그래왔듯 인터뷰이들의 말에 마음을 쏟아 귀 기울이고, 그 말들의 진정을 가다듬어 공들여 배열하면서도, 때로는 말의 내용보다 질감이나 색채를, 말 사이사이의 침묵을 더욱 헤아려, 그것들이 펼쳐내는 미지의 풍경을 새롭게 그려낸다. 그러면 그 풍경들은 다시 우리의 마음을 건드려, 그 질감과 색채와 침묵 너머에 있는, 미처 말해지지 못한 또 다른 말들을 셈해보게 하는 것이다. 그 아득함 속으로, 하염없이 잠겨들게 하는 것이다.

여성

여성들은 언제나 있어왔고 또 언제나 있음에도, 오랜 세월 역사는 남성들의 서사였다. 특별히 투쟁과 쟁취의 몫은 늘 남성에게 돌려졌으며,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 여성은 기껏해야 피해자의 위치에 놓임으로써만 담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임흥순이 바라보는 진짜 세계에서 여성들은 모두가 눈부신 투쟁가였다. 정정화, 김동일, 고계연은 온 몸으로 세상에 맞서 해방을 위해, 온전한 독립을 위해, 사람의 자유를 위해, 누구도 무참히 죽지 않을 권리를 위해 싸웠다. 강을 건너고, 산을 오르내리고, 총탄을 피해 차가운 물 속을 헤엄쳤다. 이후 투쟁의 삶을 건너온 뒤로도, 그들은 그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채 되어있지 않은 세상을 향해, 이미 몸을 던졌듯 다시 말을 던진 굳건한 증언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상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는듯 보이지만, 그럼에도 분명, 허다한 목숨들이 그들로 인해 살아남았으며, 계속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세상은 그들의 삶을 역사의 변방으로 내몰았으나, 그들은 한 순간도 역사의 소용돌이 그 한 가운데를 벗어난 적이 없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우리에게 슬퍼 말라고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여전히, 눈부신 투쟁가인, 역사의 주인인 모든 여성들에게.

특이하게도 다큐멘터리 형식의 영화 속에, 종종 재연의 장면이 끼어든다. 어린 정정화, 김동일, 고계연의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산을 오르내리고 물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그 장면들은 있었던 사건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임흥순의 재연은 새로이 구성된 과거의 파편을 현재 속으로 침투시킨다. 그것은 지나간 역사를 다시 보게 할 뿐 아니라, 오늘의 풍경 속에 여전히 스며있는 역사의 잔흔을, 그리하여 결국 우리들의 지금 여기를 들여다보게 한다. 이를 위해 재연 장면들은 현실적이기보다 시적인 색채를 띤다. 그 모든 과거는 마치 오늘의 꿈인 것만 같다. 총을 맞고 절룩거리며 도망치는 사람들, 잠자는 머리맡에 다녀간 유령의 인사, 나무 위에 걸려있던 옷가지와 깨진 솥에 남은 흰 밥, 숲 속에서 천을 뒤집어쓰고 노래하는 얼굴, 그 곁에 무릎을 끌어 앉은 소녀와 지게를 지고 지나가는 할아버지, 문득 놀란 소녀가 주위를 둘러보면 노래하던 이는 간데없고 지게 위엔 시커멓게 동상 걸린 두 발을 늘어뜨린 죽은 자신의 몸이 얹혀 있던 것, 얕은 계곡에 얼굴을 담갔다가 온 몸으로 빠져들게 된 깊고 푸른 물, 그 아래 가라앉고 있던 배, 다시 고개를 드니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던 피 흘린 시신들. 그 꿈들에 아직도 시달리는 우리의 오늘날.

현실

이 영화의 가장 절묘한 지점은 후반부에 이르러 저 재연 장면들과 다큐멘터리 사이의 경계가 일순 허물어지는 데 놓여 있다. 재연 장면에서 연기를 했던 인물들이 돌연 현실의 얼굴을 하고 다큐멘터리 속에 투입되는 것이다. 실제로 임흥순은 전문 배우가 아닌 이들에게 연기를 부탁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예술의 성취보다 앞서는 가치가 다름 아닌 참여자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일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탈북자는 다시 탈북을 하는 마음으로 산 속을 헤맸고, 앳된 대학생은 역사를 몸으로 배우는 마음으로 갈대 우거진 언덕을 달려 내려왔으며, 또 다른 탈북자는 잊고 살았던 것들을 슬피 되돌아보는 마음으로 물 속을 헤엄쳤다. 그들의 젊고 담담한 목소리는 우리에게 보다 가까운 현실을 돌아보게 하고, 함께 살아갈 날들을 헤아리게 한다. 그들 스스로가 몰랐던 것을 깨치고 잊었던 것을 기억했듯이, 우리 또한 그럴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1948년,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선거를 하루 늦춰지게 했던 개기일식의 재연 장면에서, 다시 드러난 해가 세 여인의 눈을 비추일 때, 돌아보는 얼굴들은 저 투쟁가들의 유년이기도, 도저한 오늘의 현실을 살아가는 그들 자신의 얼굴이기도, 나아가 우리들의 얼굴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의 전반부에서 한 빨치산이 말하기를, 겨울에는 언 바위 밑에 몸을 숨겨도 괜찮지만, 봄이 오면 얼음이 녹아 깨진 바위들이 마치 폭탄 터지듯 와글와글 떨어져 굴러오므로, 큰 바위 아래를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의 끝에 이르러, 얼음이 녹아 물이 되어 똑똑 떨어지고 졸졸 흘러가는 소리 가득한, 커다란 바위 하나가 눈 앞에 놓인다. 어쩌면 그 바위는 무너질 것인가. 우리는 몸을 피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무너지는 것은 도리어 좋은 일이 아닌가. 이미 너무 많은 차가운 얼음들이 우리를 갈라서게 하고, 싸우게 하고, 오직 틀림과 다름으로 서로를 규정하게 하고, 그리하여 결국 무엇으로도 스스로 규정되지 못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지워버리고, 우리의 사랑을 흩어버리고, 우리의 눈물을 가려버리지 않았던가. 그 갈라진 아픔들이 마침내 와르르 무너져 세상 속으로 쏟아지는 봄이 온다면. 우리는 그 봄을 기뻐 맞이하고, 다시 돋아나는 신록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