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재 전시 ‘우주적 _ 宇宙的’ 을 위한 에세이 (2019년 10월)

천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우주를 떠올리면, 그것은 나의 아득한 바깥 같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그려보면서도 그 까마득한 거리에 압도당할 뿐, 내가 그 안에 포함된다는, 닿아있다는, 안락을 감각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자어로 우주는 ‘집 우(宇)’에 ‘집 주(住)’를 쓰는, 인간의 가장 큰 거처이다. 우리는 태어나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그 다정한 무한에 기대 소멸한다. 되도록 우주적이고자 하는, 이서의 표현에 따르자면 ‘가장 집다운 것’이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그러므로 지극히 근본적인 생의 질서를 따르는 것이며, 어쩐지 우주처럼 고독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고독을 별처럼 매만지는 것도 우주의 일이었다. 프랑스에서 이서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작은 마을의 극장에서였다. 기실 모든 인연은 그대로 스쳐 지나갔어도 무방할 시작을 지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토록 가까워진 것은 후에 다시 만났던 날에 그녀가 내게 자신의 아픔을 남김없이 풀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참 시간이 흘러 내가 나의 고단한 사랑을 꺼내 보였을 때 그녀가 울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같이 먹고 있었는데, 처음은 파리의 일식집에서 정갈한 도시락을 앞둔 채였고, 나중은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물가에 앉아 고등어 케밥을 먹으면서였다. 눈물을 훔친 그녀가 그런데 나 고등어 케밥 하나만 더 먹어도 될까 물었을 때 나는 슬픔 없이 웃었다.

우리가 늘 무언가를 먹고 있었던 건 단지 인간이 먹는 존재여서가 아니라 우리가 만남 속에서 언제나 서로를 살리는 데 마음을 쏟았기 때문이다. 가장 맛있는 버터를 두툼하게 잘라 주고, 가장 맛있는 꿀을 시장에서 사다 주고, 홀로 터득한, 곁눈질로 배운, 수많은 요리법을 나누었던 일. 섬세한 맛의 조합을 만날 때마다 경탄하며 서로를 먹이려 한 것. 또 어떤 날은 잘 드는 소화제를 갖다주고 손가락을 따주기도 했던 풍경들. 엄마가 덖어 보낸 우엉차와 외할머니의 김치, 그녀가 내게 전수해준 정통 프랑스식 라따뚜이, 그녀의 귀국 겸 생일을 축하하던 날 내가 만들어간 약밥. 그 시절은 그렇게 다만 먹고 먹이는, 먹여 ‘살리는’ 일이 생의 전부인 것만 같은 안온으로 차 있었다.

그녀에 이어 나 역시도 한국으로 돌아온 뒤, 바삐 지내다 오랜만에 서촌의 한옥을 찾았던 날에는 비가 내렸다. 나는 며칠 전 장터에서 농부에게 산 갓 딴 토마토 몇 알과, 농장에서 주문한 두 종류의 바질을 섞어 만든 페스토 한 병을 헝겊에 싸서 그녀에게 가지고 갔다. 처마 밑 그릇들 속 고루 담긴 농작물 사이에 빨간 토마토가 자리를 찾고, 나는 마루에 앉아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빗소리를 들었다. 오이와 깻잎, 수박을 채썰어 곱게 올린 콩국수를 총각무와 함께 먹고, 우리는 바구니에 수박을 담아 비 그친 수성동 계곡에 가서 잠시 그림이 되기도 했다.

그녀는 프랑스가 그다지 그립지 않으며, 그날 함께 나눈 음식이 ‘프렌치’와 크게 다를 바 없음을 이야기했다. 따뜻한 차를 호로록거리며 나는 동의했다. 프랑스에 여행 온 사람들이 프렌치 음식이 어떤 것이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특정 메뉴의 이름을 대는 대신, 제철 식재료를 절묘하게 조합해 고유의 맛, 향, 식감을 한층 끌어내면서 총체적인 감격을 선사하는 것이라 말하곤 했다. 몇몇 식당을 추천하며 거기 한 접시에 나오는 색색의 음식을 모두 조금씩 잘라 한 입에 꼭 먹어보기를 권하면서. 그런 종류의 ‘프랑스적인 것’은 사실 그 자체로 ‘우주적인 것’이기에 우리 몸에 배여 영원한 습관으로 남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식사를 이루는 풍경들은 단순히 무엇을 먹느냐로 환원되지 않는다. 일상을 이루는 모든 소소한 일들이 거기 포함되기 때문이다. 집을 나서 사람들을 만나 식재료를 구하고, 구비된 것들로 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조합을 공들여 상상하고, 그때그때 몸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남아있는 것과 더할 것과 그리하여 또 남을 것에 대해 생각하고, 함께 먹을 이의 체질과 기분을 떠올려보고, 그릇을 고르고, 곁들일 물의 종류를 고르고, 천천히 음미하고, 그릇을 씻고, 남은 음식물을 정리하고, 그릇을 닦고, 마른 그릇을 찬장에 넣는 일. 그렇게 다만 ‘먹고 사는’ 것으로 생을 탕진하는 찬란.

그렇게 하루에 두어 끼를 챙겨 먹고, 그 밖에는 그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해내지 못했을 때, 우리는 쉬이 그 날을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고 기억하지만. ‘아무 것’에 해당하는 그 일이 사실은 전부인 시절도 있는 것을. 우리는 우주 속에서 가장 우주적으로 살아가는 일을 날마다 하고 있음을. 그 다정한 전언을 나는 이서의 그릇 속에서 본다. 단단하게 구워진 흙처럼 서로를 지탱해주다, 다시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흙에서 난 것들로 식사를 차리며, 마주한 얼굴을 닦아줄 우리. 그렇게, ‘먼지 같은 사람과 먼지 같은 시간 속에서 먼지 같은 말을 주고 받고 먼지 같이 지워지다 먼지 같이 죽어가겠지.’ (이제니, 별 시대의 아움) 그 후에도 몇 개의 그릇은 남아, 또 누군가의 우주적 식사를 소복이 담을 것이다.

사진_이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