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한겸 ‘많은 여행과 큰 외로움’ 전시 서문 (2017.10.10-10.17)

얼마 전 가수 요조는 ‘나는 아직도 당신이 궁금하여 자다가도 일어납니다’ 라는 긴 제목의 단편영화 형식으로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을 사서 노래를 듣는 일은 응당 개인의 은밀한 시간 속에 환원되는 일.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앨범 전체를 통째로 들으며 그 하나의 시간을 여럿이 함께 통과할 수는 없을까. 질문의 끝에서 영화가 만들어졌고, 관객은 상영관에 앉아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이사이 삽입된 노래들을 감상하는 것으로 앨범을 소비했다. 그리고 기꺼이 감당했다. 노래를 골라서 듣지 못하고, 노래와 이야기를 분리하지 못하는 것을. 따라가야 하는 것을, 함께 본다는 것을. 어떤 도저한 고독 앞에서 멈춰설 수 없음을. “아직도 궁금하여 자다가도 일어나는” 당신의 결말을 향해 흘러 나아가는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을.

서한겸의 전시 ‘많은 여행과 큰 외로움’ 에도 유사한 장치가 있다. 작가는 하루 두 번, 정해진 시각에 롤을 펼쳐 그림을 보여준다. 한쪽을 펼치며 동시에 반대쪽을 말아, 균일한 폭의 이미지만을 이어주면서. 그렇게 흘러가는 매 폭의 그림은 스크린에 투사된 매 순간의 필름처럼 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의 시간 속으로 관객을 이끈다. 그러나 저 영화의 경우와 달리, 서한겸의 롤 그림에는 결말도, 따라감을 안도케 할 모종의 내러티브도 없다. 말은 썼다가 뭉개져 다시 삭제되었거나, 남아있더라도 꿈 속의 대사처럼 의미를 채 입지 못하고 지나쳐질 뿐. 그리고 언어가 무력한 그곳에, 집을 잃은 존재들이 그려진다. 말 없는 몸들이 그려진다.

이어지는 몸들. 여러 개의, 하염없는, 혹은 처음부터 하나였었던. 엎드린, 구부린, 얼굴 없는, 섹스하는, 도약을 기도하는, 손발이 묶인, 헤엄치는, 물이 고인, 똥을 싸는, 팔을 뻗은, 쪼그려 앉은, 고깔을 뒤집어쓴, 부처를 흉내내는, 거대한 뜀틀 앞에 선, 어깨를 다독이는, 안아주는, 절규하는, 키스하는. 그리고 얼굴들. 웃는, 불만인, 눈이 일그러진, 눈을 감은, 고함치는, 초록으로 물드는, 표정 없는, 그러나 저마다 다르게 생긴, 그러나 지워진, 응시하는, 초연한, 잡목들 속에 묻힌. 이것은 « 많은 여행 가운데 크게 외로운 », 종이처럼 말려 이어진 몇 겁의 삶을 편력하는, 우리들의 몸이 통과하여 겪는 뼈아픈 경험의 찬연한 축적.

그리고 거기 몇 개의 질문들이 무력한, 최후의 문장처럼 새겨져 있다. “내가 왜 이리 슬플까, 물어보리라.” “이런 고통을 겪고도 견디고 살아야 할 이유가 뭐가 있겠을까 ?” “넌 견딜 수 있는데, 나는 견딜 수 없는데 ?” 이 중 어떤 글씨체의 휘갈김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 손의 감각이 사라져 왼손으로 겨우 흘리듯 글씨를 썼던, 그럼에도 무언가를, 부은 발에 대하여, 병원 복도를 천천히 두 번 왕래하는 하루의 산책에 대하여, 그럼에도 쓰고 말았던 내 아버지의 그것과 닮아 있다. 말하자면 의미보다 간절한 할큄의 흔적 같은 것. 이 물음들은 애초에 답이 없기에, 커다란 캔버스를 채워 답을 구성해가는 방식이 아닌, 그저 흘려보내는 방식으로 작업된 것이 아닐까. 꿈처럼. 자유연상처럼. 무섭게 가라앉았다 돌연 해맑아지는 우리의 기묘한 진실들처럼.

그렇게 그림이 그려진 방식은 보여지는 방식과 일치한다. 작가도 관객도 그 롤의 아득함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 답 없이 이어지는 질문 같은 삶들을 우리가 빠져나올 수 없듯이. 한 번 말려 들어가면 때로는 잊혀지지만, 그럼에도 엄연히 존재했고, 아프게 들러붙는 환영 같은 것들. 비명처럼 공명하는 것들. 쓸쓸한 잔흔들. 마침내 종이가 끝나도 지속될, 흘러갈 삶. 그림. 그러므로 작업의 방식은 존재의 방식과도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을 전공했다가 미술로 옮겨간 전적으로 인해, 서한겸은 종종 “철학을 전공해서 ?” 라는 질문을 마주한다. 그러나 답 없는 물음들을 배태한 것은 애초에 서한겸 본인이었을 뿐. 그 물음들이 꿈처럼 자기를 감싸는 삶이어서, 한때는 철학을 기웃거렸고, 지금은 그림을 그린다고, 이렇게, 그린다고, 이번에는 직접 두 손으로 펼쳐 “보여주는” 일. 보여주는 일이 따뜻하지 않은가 생각해보았다. 그것이 존재에 관한 일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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