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는 저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미처 녹음기를 챙기지 못했던 어느 여행길에 산통이 시작된 바람에 제가 세상에 나던 첫 순간은 기록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후에 옹알이를 하던 것, 또는 처음 말을 시작하던 무렵의 목소리 등은 아직도 몇 개의 테이프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을 들어보면 제 옹알이 소리보다 훨씬 크게 저의 귓가를 울리는 것은 옹알대는 저를 어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때 그 목소리는 저의 세계였습니다. 티끌 한 점 없는, 한이 없는 사랑과 이해의 속삭임 속에 저는 있었습니다. 테이프가 늘어난 탓에 목소리는 변질되었지만 저는 그것이 ‘엄마’임을 단번에 알아봅니다.
목소리란 그 사람의 존재이며, 존재했음의 증명이고,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그 언젠가의 ‘지금, 여기’가 남긴 가장 치열했던 현전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연극 같은 것 말입니다.
목소리가 존재라는 건 그것이 늘 타자와의 관계 속에 놓여있다는 뜻도 됩니다. 목소리는 대개 스스로를 위해 발생되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나로부터 다른 누구에게로 가려 합니다. 그러는 사이에 공기도 만나고, 벽에도 부딪힙니다. 누군가의 귓속으로 미끄러지기에 앞서 그의 머리칼을 오래 만지작거리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무대 위에는 언제나 비가시적인 목소리의 블로킹이 그려집니다. 그것은 때로 목소리가 전달하는 말의 내용보다 더 크게 공명합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알지 못합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내 귀에 와 닿는 내 목소리와 다른 사람들이 듣는 내 목소리는 다릅니다.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기묘한 낯설음과 부끄러움을 느껴봤던 적이 있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더 좋거나 나쁘다가 아닌, 이상하다는 감각이 앞섰을 것입니다. 타자와 나 사이에, 서로의, 또 각자의 목소리들 사이에는 그렇듯 이질감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이질감으로부터 관계가 발생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언제나 이질적인 주파수를 교환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질감이나 데시벨 같은 순전한 감각들도 있고, 태도나 시선이나 마음 같은, 눈물이나 욕망이나 위로 같은 것들도 담겨 있습니다.
목소리가 말합니다. 목소리가 노래합니다. 목소리가 웁니다. 목소리가 비명을 지릅니다. 목소리가 침묵합니다. 어쨌든 목소리의 주인이 아니라, 목소리 자체가 주체입니다.
인물이 연극에서 나이를 먹으면 무대 위에서는 배우의 목소리가 늙습니다.
예술 중에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이 있습니다. 전자에 해당하는 연극 같은 경우에 있어서도, 실제로 들리는 것은 배우의 목소리 뿐, 작가나 연출가나 오브제나 공간의 목소리 같은 것은 물리적으로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술에 한하여, 전적으로 귀머거리인 관객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관객은, 독자는, 청중은, 예술가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2.11 http://indienbob.tistory.com/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