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도쿄데쓰락, 세 사람 있어!, 혜화동 1번지, 2012.10

지난 10월,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되었던 <세 사람 있어!>(제12언어 연극 스튜디오)의 한 장면이다. (내용상으로는 두 사람의 대화이나 이를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재룡 : 나랑, 얘랑 누가 한재룡이야?
민규 : 나랑 얘는 다른 사람이야?
재룡 : …어?
민규 : 너 왜 그래?
재룡 : 잠깐 기다려봐… 두 사람 있지? / 무슨 말이야.
민규 : 어? / 어디에?
재룡 : 지금, 여기.
민규 : 어? / 세 사람이잖아.
재룡 : 어? 아, 그러니까 세 사람. / 어? 세 사람 있어?
민규 : 세 사람 있어. / 세 사람 있지.
재룡 : 세 사람 맞아.
민규 : 뭐야 그게.

공연의 포스터에는 세 사람이 나란히 팔을 괴고 옆으로 누워, 우리를 향해 사뭇 다정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커다랗게 쓰여진, 세 사람 있어, 느낌표. 글자를 보고 읽는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목소리가 작동하는 일이라, 나는 그 유쾌한 포스터를 보며 자연, 속으로 그 말을 읽으려 시도한다. 그런데 도대체가 그 말의 억양을 상상해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세 사람 있어, 쉼표, 같은 여운도 아니고, 그 여운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숱한 가능성을 점칠 일도 없이, 밑도 끝도 없는 단정의 느낌표가 떡 하니 박혀 있는 까닭이다. 이제 상상의 여지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느낌표의 감정뿐이다. 절망? 환희? 아쉬움? 깨달음? 다소 억지스런 확신? 혹은 강요?

앞서 인용한 대화에서 재룡과 민규는 얼떨결에 합의에 도달했다. 지금, 여기에 세 사람이 있다고. 그러나 그것은 동상이몽. 각자가 생각하는 세 사람은 다른 세 사람이다. 쉽게 말해 여기서 세 사람이라는 조합이 두 사람과 한 사람의 모임으로 만들어진다고 할 때, 누가 두 명이고 누가 한 명인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말이다. 아니, 생각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그들에게 그것은 사유가 아니라 실제니까. 재룡의 눈앞에는 실제로 자신을 포함한 두 명의 재룡과 한 명의 민규가, 민규의 눈앞에는 실제로 자신을 포함한 두 명의 민규와 한 명의 재룡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장 실제적인 그 사실이 상대에게도 진실이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에게 있어, 지금 거기에는 동일하게 ‘세 사람이 있다’는 것.

무대는 누군가의 집이다. 동그란 탁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위에 만화책들이 쌓여있고, 한 남자가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권태를 달래고 있다. 삼면으로 크게 각이 나 있는 벽 위에는 상의가 한 벌씩 걸려 있는데, 각 삼면은 색색깔의 술로 가려져 있어, 어딘지 모르게 연출가(타다 준노스케)의 전작(<재/생>, 2011년 연말 정보소극장에서 공연)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여기서 남자(김송일 분)의 권태는 <재/생>에서와 달리 자살을 앞둔 이의 사이비 권태가 아니며, 죽음 직전의 한바탕 땀 범벅된 춤과 노래로 발전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에게 어떤 남자(마두영 분)가 찾아와 이렇게 묻는다.

1 저, 뭐 하시는 거예요?
2 뭐 하시는 거냐…뇨?
1 아니, 그러니까 뭐 하시는 거냐고요?
2 뭐가 어째요?
1 아니 저기요, 어, 그러니까 좀 나가주실래요?
2 에?
1 그게요, 그러니까, 어, 왜 남의 걸 쓰고 있어요?
2 뭐래니?
1 아니, 안 그래요?
2 뭐가 안 그래요?
1 네?
2 뭐냐구요, 그러니까 당신,
1 어? 당신 누구야?
2 뭐? 아니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요?
1 아, 그게요, 저, 전 이 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길게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한 여자(김유리 분)가 여기 동참하고, 셋은 자신들이 모두 한 사람(한재룡)이라고 우긴다. 그들은 모두 한재룡으로서 지금껏 살아왔으며,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줄곧 한재룡의 방인 그 곳에 있었고, 그랬다가 누군가는 잠깐 나가 영화를 보고 왔으며 누군가는 집에서 계속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것. 서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던 이들은 너무 많은 증거 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곧 다시 따져 묻기 시작한다. 너도 한재룡이고 나도 한재룡이라고 치자, 그렇지만 누가 더 진짜 한재룡이지? 그리하여 그들은 친구 노민규를 찾아가는데, 거기서도 두 명의 민규가 아웅거리며 진짜 가짜 타령 중이고, 재룡과 민규 사이에 낀 여자 소라마저 둘로 분열된 자기를 끌고 찾아와 이 논쟁에 동참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계속해서 지금, 여기에 몇 사람이 있는지이며, 과연 누가 진짜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재룡 중에 한 사람, 민규 중에 한 사람, 소라 중에 한 사람이 그 공간을 떠나보기로 한다. 그가 떠났는데도 그의 몸이 떠나지 않고 가시적으로 남아있다면 남아있는 쪽이 진짜라는 식. 그리고 마지막으로 혼자 남은 한 배우가 이렇게 일인 삼역을 한다.

소라 : 나 보여?
민규 : 응.
소라 : 어머 정말?
민규 : 보여.
소라 : 그럼,
재룡 : 아니 그러니까 나간 쪽이 가짠 거지.
민규 : 뭐 나갔다는 것도 모르지만, 우린.
소라 : 어, 그럼 오빠, 나… 나?
재룡 : 응, 그래 맞아맞아.
소라 : 다행이다.
재룡 : 정말 다행이야.
소라 : 응.
민규 : 왜?
재룡 : 그러니까 너도 누가 가짠지,
민규 : 아, 진짜 근데 난 안 나갈 거야. / 아니 그러니까 누가 나가든 똑같은 거라니까. / 그럼 니가 나가. / …
소라 : 나갔어?
민규 : 아직.
재룡 : 뭐야.
민규 : 알았어, 그럼 내가 나갈게.
재룡 : 응, 뭐 어느 쪽이 나가는지 모르지만, 안 보이니까.
민규 : 응, 그럼.

그리고 이제 무대는 텅 비었다. 그러나 아직 거기에는 세 사람이 남아, 각자 진짜인 재룡, 민규, 소라로 확인된 데 대한 기쁨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정작 진짜인 재룡, 민규, 소라는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만을 들을 뿐이다. 거기, 누가 있는가.

작품이 폭로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이상이 노래했던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느냐” 같은 것과는 또 다른 감성이다. 그 아득한 역사의 굴레보다 더 혼돈스러운, 동시적인 공존이자, 지금 여기 우리의 문제이다. 오늘 문득 내 방에서 눈이 마주친, 너와 나의 오롯한 무게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공존의 문제는 작품 내부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먼저, 재룡(김송일)의 집에 침입했던 또 다른 재룡(마두영)이 또 한 명의 재룡(김유리)에게 논쟁의 자리를 넘겨주고 어느 순간 조용히 라면을 끓여먹는 장면을 생각해보자. 나머지 두 재룡이 여전히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재룡(마두영, 혹은 이때 그는 이미 민규가 되었다)은 라면을 먹으면서 탁자 위에 놓인 만화책을 뒤지다 만원짜리 지폐를 발견하고 기뻐한다. 그는 만화책을 보다가 내려놓고 라면을 입에 넣은 뒤, 또 만화책을 보는 일을 반복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내려놓은 만화책을 재룡(김유리)이 들어서 살펴보고, 민규(마두영)는 갑자기 책이 없어지자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잠시 후에 재룡(김유리)이 내려놓은 만화책을 다시 발견한 민규(마두영)는 숙연하게 만원짜리 지폐를 제자리에 놓으며 보이지 않는 유령에게 참회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서 평생을 살아왔다는 저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에 하나의 그럴듯한 설명을 부여해준다. 그러니까 둘은 언제나 함께 살고 있었으되, 서로에게 비가시적인 채로 공존하고 있었다가, 하필이면 오늘 갑자기 결계가 깨어지고 서로를 볼 수 있는 눈이 허락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연극은 답을 주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이 장면을 그저 잠깐, 공존의 방식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보여주는 기능으로만 국한시켰다. 작품 전반에 깔려 있는 그 유쾌한 무심함.

공존에 대한 또 다른 변주는, 서로의 존재에 대해 아웅다웅하던 재룡(김송일과 김유리)이 문득 민규에게 소라를 빼앗겨버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때에 등장한다. 이때 그들은 또 다른 나의 존재가 단지 살 떨리는 두려움이나 더러운 혐오감이 아닌,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위로일 수도 있음을 내비친다. 사실 작품은 재룡의 분열과 더불어 소라의 분열마저 제시함으로써 ‘도대체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가?’ 라는 거대한 물음을 은연중에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지기를 그만 두고, 우리는 그저 누가 누구를 사랑했든, 그때에 또 다른 내가 사랑에 빠진 나를 조금 더 멀찍이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가 지금 이별한 나를 위로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련하게 이해한다.

한편 둘은 일을 분담할 수 있는 동지가 될 수도 있다. 두 재룡(김송일과 김유리)은 각자에게 ‘마감이 코앞인데 밖에 나가서 영화나 보다니’ 또는 ‘집에 있었으면서 하나도 못 해놓고 있었다니’ 라고 말하며 서로를 구박한다. 그러나 이 구박이 정겨운 것은, 차단된 두 세계에서 살 때와는 달리, 이제는 두 사람이 서로 힘을 합쳐 귀찮은 일들을 해치움으로써, ‘내 몸이 열 개였으면 좋겠네’ 하는 식의 현대인의 푸념 섞인 바람을 구현해낼 가능성을 엿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이 연극에서 그들은 진짜와 가짜를 가리는 놀이 끝에 다시 헤어지고 말았다. 보이지 않는 세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스스로를 진짜라 믿으며 저마다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살아가려면 자신이 진짜라는 것을 반드시 믿어야 하니까.) 그러다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관객은 눈앞에서 그들 모두를 다 잃었다. 어쩌면 그들은 진짜와 가짜를 가리느라, 이 세계에서 양쪽 모두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세 사람 있어, 느낌표. 그러므로 공연을 다 보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이 말을 어떤 억양으로 읽어내야 할지, 복잡하고 또 막막한 것이다.

타다 준노스케의 전작인 <재/생>에서는 말보다 몸이 주인공이었다. 거기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몸, 무던하고 담대한 몸, 시시콜콜한 시사 문제나 사랑 이야기를 떠들어대다가 기진맥진하여 죽어버리는, 그리고 다시 재생되는 음악 같은 몸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타다 준노스케의 전작들을 익히 알고 있던 이라면 고개를 갸웃할 정도로, 몸보다 말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세 사람 있어, 느낌표. 이 말의 억양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아직 알지 못하지만, 나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할지를 결정했다. 그것은 ‘세 개의 몸이 있어’ 이다. 만일 이 작품에 재룡 둘(단 한 순간에만 재룡 셋), 민규 둘, 소라 둘, 하여 여섯 명의 배우가 등장해서 연기를 했더라면 정말이지 별다른 흥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세 명의 배우가 연기했기 때문에만 의미를 갖는 작품이었다. 세 명의 배우가 번갈아가며 일인 다역을 펼쳤기 때문에, 관객은 혼란스러웠고, 혼란 속에서도 유쾌했다. 그리고 세 명의 배우밖에 없었기 때문에, 재룡과 민규와 소라가 각각 한 명씩 집 밖으로 나가버렸을 때에, 마침내 무대는 텅 빌 수가 있었다. 다시 말해 세 개의 몸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몸들이 사라지자 관객의 눈앞에서 그들의 세계 또한 사라져버릴 수 있었다.

공연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이 곁들여져있다. 네 사람…? 다섯 사람…? 여섯 사람…? 아무튼지 무대에는… 세 사람 있어, 느낌표.’ 여러 가지 다양한 가능성들을 너무 일찍 차단해버린 감이 없지 않지만, 확실한 것은 결국 세 개의 몸이리라는 나의 심증을 확인해주는 문장이다. 아무튼지 무대에는, 세 개의 몸이 있었다. 그 몸들은 재룡과 재룡의, 민규와 민규의, 소라와 소라의, 삶이며, 시간이고, 역사이자, 꿈이고, 권태이고, 의무이고, 우정이고, 사랑이었다. 실제로 나는, 나의 역사는, 나의 꿈과 나의 사랑은, 분열되고 분열되고 또 분열된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만큼의 분열을 거듭하든, 그것은 타자인 관객의 눈앞에 오직 하나의 몸으로 현존할 뿐이다. 여러 명의 나 중에서 누군가가 떠나도, 실제로 타자의 눈이 보기에 나는 한 몸으로서 거기 남는다. 그리고 그 몸이 ’진짜‘라는 설정은 실로 의미심장하다. 진짜는 이것인 것이다. 지금, 여기에, 무대 위에, 몸이 있다는 기적. ‘사람’이라는 말 속에 또아리를 튼, 사람의 주인인, 육체.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2.11 http://indienbob.tistory.com/6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