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성북동비둘기, 하녀들,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1.9-2011.10
연극이라는 것은 무릇 실제 자체와는 다른 것이기에 다소간의 과장을 언제나 수반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과장이나 왜곡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가령 어떤 작품에서는 과장이 극적 허용의 범위 내에서 적당한 거리 두기와 함께 이루어지고, 어떤 작품에서는 과장이 극에 달하는 정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후자에서의 과장은 연극적인 과장의 소소함을 넘어서 거의 실제와도 같은 강렬함을 수반하는 극한의 체험으로 연결된다. 경계까지 가는, 혹은 경계를 뛰어넘는 그와 같은 장치는 오늘날의 소위 포스트드라마나 포스트모던 연극에서 종종 발견되고 있다. 그렇다면 극한으로 몰아가는 그 장치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드라마가 드라마로 머물지 않고 온갖 상흔을 노출하며 경계 바깥을 향해 헐떡이며 과장하며 달려가 버리는 이유는? 2010년 아비뇽 연극제에서는 한 공연을 대상으로 ‘왜곡/극한으로 몰아가기(exagération)’라는 개념을 고찰하는 작은 책자를 발간한 바 있다. 거기서 프랑크 보샤르(Franck Bauchard)는 다음과 같이 쓴다. “공허해지거나 방만해지지 않기 위해서 경계를 뛰어넘기. 죽지 않기 위해서 과장하기.”
그리고 이 말은 위태로이 경계(bornes) 놀이를 하고 있는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하녀들(bonnes)에게 너무도 잘 들어맞는다. 기존 다른 연출들의 버전이나 주네의 원작에서 하녀들이 비극적인 자신의 처지를 연극적으로 조소하기 위해 그에 거리를 취하는 방편으로써 마담놀이를 즐겼던 것과 달리, 이 연극에서 하녀들은 ‘놀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서’ 연극을 한다. 그리하여 손에 만져질 듯한 환멸로 끌레르의 목을 조르며 쏠랑쥬는 말한다. “비웃지 마세요. 아! 무엇보다 제가 큰소리를 친다고 비웃지 마시라구요.” 이때 ‘큰소리(grandiloquence)’라는 말은 단순한 외침을 넘어 과장이나 호언장담의 뜻을 내포한다. 요컨대 그들의 외침은 극적인 치장이 아니라, 극한으로 내몰린 자의 처절한 울부짖음이요 파열된 비명인 것이다. 그것이 설혹 드라마적 유희의 달콤함에 익숙한 오늘의 관객들에게 거북하고 불쾌하게 다가올지라도, 비웃을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는 이미 연극이 삶 자체이며,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하녀들의 공간인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는 그 이름부터 ‘일상지하’, 즉 삶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들어서자마자 습하고 쾨쾨한 분위기가 풍기는 그 곳에서는 끌레르가 조소하듯 ‘수채구멍 냄새가’ 난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푸른색 철제 의자가 빼곡하게 깔려 있고, 곳곳에는 선명한 핏자국이 흥건하다. 가운데는 마이크와 마이크대 하나, 작은 엠프 하나. 멀리 의자들 사이에 피가 흘러나오는 노란색 소품상자 하나. 그리고 관객이 들어서기 전부터 객석 한 귀퉁이에는 땀에 젖은 두 하녀가 웅크려 앉아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들의 연극이, 혹은 그들의 삶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를 감히 가늠할 길이 없다. 분명 그곳은 이미 오래 전부터 하녀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곳이 또한 극장이며 객석이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처음 입장한 관객들은 어디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 할지 난감하다. 표면상으로는 어디에 앉아도 이상할 것 없는, 그 곳은 지하 공간 가득 펼쳐진 객석이기 때문이다. 그 객석에 하녀들이 몸을 숨긴 채 떤다. 마치 지하 세계에 웅크리고 있는 일상의 숨겨진 진실들처럼. 지하이자 극장인 그들의 공간이 암시하듯, 진실과 연극은 그렇게 한 끝 차이로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하녀들이 이미 무슈를 살해한 다음으로 원작의 상황을 가져온다. 그것은 그들의 연극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극도의 절박함에서 나오는 일종의 몸부림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진중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슈의 살인이라는 모티브를 넘어서,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의 하녀들의 상태, 그 숨 막히는 삶의 순간에 놓여 있다. 벌벌 떨다가, 숨을 헐떡거리다가, 태연한 척 하다가, 다시 땀을 뚝뚝 흘리며, 무언가를 가장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 상태에서 그녀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어쩌면 부지불식간에 연극을 한다. 그리하여 태연한 척 가면을 쓰고 있는 동시에 매순간 그들은 가면 너머의 벌거벗은 얼굴을 여지없이 노출시키고 만다. 그 겹침과 혼돈이 바로 하녀들의 상태이며 그들의 삶의 순간이다. 말하자면 그들이 숨을 내쉬고 땀을 흘릴 때마다 습기와 한기를 더해가는 저 지하 공간에서 관객들이 고스란히 함께 겪어야 하는, ‘실제의’ 순간들인 것이다.
여기서 관객들이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특별히 그녀들의 ‘몸’이다. 하녀로서의 삶이 깊이 아로새겨진 그들의 몸. 그 몸들은 의자들 사이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대걸레를 손걸레처럼 쥐고 바닥에 앉아 핏자국을 닦느라 손끝이 뭉개지며, 때로는 숨고, 때로는 처절하게 내팽개쳐져 치욕스럽게 노출된다. 처음 마담놀이에서 그들은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되 일전에 무슈가 저질렀을 법한 행패들을 암시하는데, 이때 마이크를 성기처럼 달고 쏠랑쥬(연해성 분)를 강간하려 하면 끌레르(정혜영 분)의 몸은 폭력적인 남성의 몸이 되고, 그녀가 쏠랑쥬의 배를 마이크로 두드리며 심장박동소리를 내면 쏠랑쥬의 몸은 갓 아이가 들어앉은 임신한 몸이 된다. 그때마다 관객들의 몸도 동일하게 반응하여, 노란 상자를 마이크로 내려치는 살인 장면이나 저 강간 장면에서는 고스란히 불편함과 거북함이 느껴지고, “너 임신했지?” 하고 마이크로 배를 치는 장면에서는 마치 그 박동이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숨 막히게 가슴이 울린다. 심리적인 감정이입과 달리 이는 불편하고 괴로운 몸의 감각을 철저히 함께 겪는 신체적인 공감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하녀들이 극적 인물로서가 아니라 현실의 사람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존재 자체로 벌거벗겨져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허옇게 분칠한 얼굴로 바닥에 내던져진 끌레르는 말한다. “창피해, 언니.” 멀찍이서 그녀를 따스히 위로하는 쏠랑쥬를 향해 다시 한 번, “창피해, 언니.”
이렇듯 하녀들의 상황은 ‘실재하는’ 삶 자체이다. 그렇다면 마담은 누구인가? 탁월하게도 이 연극은 마담(김미옥 분)을 처음부터 객석에 앉혀놓고, 공연 도중 하녀들의 연극을 도저히 못 봐주겠다며 벌떡 일어나는 히스테리컬한 평론가로 둔갑시켰다. 그 결과 마담의 등장에 의해 하녀들의 상황은 ‘부재하는’ 무언가로 소급된다. 그들에게는 살인도 강간도 치욕스런 삶도 실재이지만, 마담에게 그 모든 것은 표현만 넘칠 뿐 제대로 된 드라마가 되지 못한, ‘잘못 만들어진’ 연극에 지나지 않았다. 해체와 재구성에 탁월한 연출가 김현탁은 원작의 대사를 거의 훼손하지 않은 채로도 이 엄청난 균열을 능히 가지고 논다. 원작의 자명종을 핸드폰으로 대체하고, 끌레르가 두려움에 떨며 전화를 받을 때 객석 뒤편에서 마담의 나른한 목소리가 “공연 보고 있어요. 그쪽으로 갈게요.” 하고 대답하는 장면의 기발함은 전초전에 지나지 않았다. 하녀들이 마담의 살해를 도모하며 즐거워하는 장면에 이르자 마담은 기어이 박수를 치며 객석에서 일어난다. 섬뜩한 것은 그녀가 무슈의 살인이며 강간이며 마담 자신의 살해음모에 관한 그 모든 것을 처음부터 전부 지켜보았으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는 것, 즉 그녀에게는 저 처절한 현실이 단지 허황된 연극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마담은 잔인하게 하녀들의 연극을 조소하는 평론가이고, 그렇기에 그들의 연극 뿐 아니라 그들의 실제적인 공간과 몸 자체를 비웃는 무시무시한 권력을 휘두르는 존재로 그려진다.
이는 사실상 평론가의 펜 끝이 연극인들의 삶을 좌우하는 오늘날의 세태를 반영한 것으로, 작품 외적으로 보았을 때는 평론가와 연극의 관계 자체에 대한 의문마저 제기하게 만든다. 실제로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선출이나 상급에 의해 그 직위를 얻게 된 것이 아니며, 그런즉 관객이나 연극인들이 직접 부여해준 것이 아닌, 다분히 출처가 불분명한 권위를 지닌 자들이다. 게다가 그 권위의 정처 없는 순환은 연극인들도 평론가들도 모두 책임을 모면할 수 없는 이상한 주종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생시킨다. 예컨대 마담놀이 중 끌레르의 대사인 “하녀가 존재할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덕분”이라는 논리가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은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그 평론가가 예술가들에게는 삶 자체인 연극에 대해 편견과 아집에 매인 자신의 기준만을 들이댄다고 한다면, 과연 그 목소리는 이 극에서처럼 확성기에 대고 귀가 찢어지게 터져 나오는 끔찍함이지 않겠는가. “갈수록 더하는구나. 끔찍한 글라디올러스, 넌덜머리나는 장미, 게다가 미모사까지! 이 미친 애들은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고 해도 뜨기 전에 새벽시장을 헤맬 거야.” 이 말을 단지 하녀들에 대한 마담의 대사가 아닌, 가난하고 소외받는 연극에 대한 한 권위 있는 평론가의 문장으로 읽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폭력성을 상상해 보라.
그런데 이 연극은 그 폭력성을 부상시킴과 동시에 또 한 번 그것을 능청스레 뛰어 넘는다. 요컨대 마담의 조소에도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하녀들은 삶의 층위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살인이 발각될까 두려워하면서 마담을 죽여야 한다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마담의 대사는 연극에 대한 함의를 끝없이 내포하는 반면, 하녀들의 대사와 몸짓은 삶의 자리로 처절하게 되돌아간다. 가령 마담은 “너희들은 참 좋겠다. 감수성 같은 건 필요 없잖니?” 라며 의자를 옮기던 하녀들의 움직임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낸다. 실제로 그 직전에 하녀들은 마담이 올까봐 재빠르게 공간을 치우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의자들을 날랐고, 지하실의 반 정도를 채우고 있던 객석 의자가 모두 옮겨지기까지 관객들은 그 곤란함과 위태로움을 고스란히 느끼며 옮겨지는 의자의 무게만큼 불편함을 겪었다. 그것은 앞서 언급했듯 오늘날의 포스트드라마 연극에서 만날 수 있는 ‘극한까지 함께 겪음’의 순간이었으며, 말하자면 연극이기보다 도리어 실제적인 숨 막힘에 가까운 체험이었다. 그런데 마담은 그 처절함을 저급하고 구차한 신체적 표현으로 치부하면서, 무너진 의자들을 다시 노란 상자 위에 거칠게 옮겨 덮는다. 그러나 그 옆에서 떨며 의자를 받아드는 쏠랑쥬에게는 그 비난이 연극에 대한 비난으로 곧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쏠랑쥬는 마담이 자신의 몸짓을 흉내 내며 조롱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몸부림이 기껏 우스꽝스런 극적 제스처로 전락하는 것보다, 살인의 흔적이 담긴 노란 상자에 마담의 시선이 머물까 하는 그것이 훨씬 더 크고 무서운 일일 뿐이다.
이와 같은 시선들의 차이, 그 만나지 않는 평행선은 이 연극의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가령 이후에 마담이 하녀들에게 옷이며 소품들을 나누어줄 때 그 의도는 제대로 된 극적 무대를 만들게 하려는 데 놓여 있지만, 끌레르는 다만 마담이 상자를 뒤지는 것에 소스라쳐 “도저히 못 입겠어요. 너무 아름다워요.” 라며 상자를 가리고 드레스에 감탄하는 척을 하지 않던가. 이렇듯 매순간이 살얼음인, 연극과 삶의 구분을 모르는 그들에게 “너희들의 친절 짜증나!” 라고 외치는 마담. 그리고 그런 마담에게 “저흰 절대로 마담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라고 끄덕이는 쏠랑쥬. 그들의 대사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제각기 다른 의미를 품고서 발화될 때면, 마치 외따로 떨어진 섬 위에 살고 있는 혼자인 사람들과 그들 사이를 흐르는 가없는 물길이 눈앞에 멀리 펼쳐지는 듯하다. 말이란 언제나 그때그때의 맥락 속에서 발화되는 것이고, 그 맥락의 소통불가능성은 결국 말의 소통불가능성으로 귀결된다. 딛고 선 세계가 다르므로 사람들은 모두 섬이다. 그래서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이해하며 보고 싶은 대로 보고는 그것이 전부인 양 안심해버린다. 말하자면 연극이, 그리고 삶이 언제나 그러하다는 말이다.
한편 연극과 실제 사이의 균열은 마담이 등장하기 전부터 수차례 암시된다. 전화를 받은 후 허겁지겁 의자를 나르는 동안 무대 한 켠에서 분장을 하고 있는 끌레르를 보고 쏠랑쥬는 외친다. “너 뭐하니? 이제 네 자신으로 돌아와야지. 다시 내 동생이 돼야지.”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미 이전의 마담놀이가 연극이 아닌 실제였던 까닭에, 끌레르는 과연 어떤 얼굴이 되어야 자기 자신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이었기에 다시 돌아갈 얼굴이 없다. 그들은 연극과 현실 사이에서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늘 위태로웠으나, 어쩌면 정작 그 경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경계 없음의 처절함을 딛고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연극 놀이를 시작한다. 그들은 물가에서 놀던 옛날을 추억하며 물놀이를 하기도 하고, 달빛 비치는 숲에서 마담의 시체를 토막 낸 뒤 이렇게 물을 주리라 하며 마이크 대를 들고 오줌 싸는 시늉도 한다. 그러나 쏠랑쥬가 끌레르를 업고 그 기분 좋은 연극을 계속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끌레르는 마담놀이의 현실로 돌아가 살인을 운운하며 쏠랑쥬의 목을 조른다. 이렇듯 경계가 없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언제 어디로든 빗나갈 수 있기에, 그들은 서로 언제든 죽여 버릴 듯 위태롭다.
이 위태로운 겹침은 마담의 퇴장에서도 엿보인다. 떠나기 전 마담은 하녀들에게 옷과 소품들과 프로시니엄을, 다시 말해 연극을 선물한다. 그녀는 지하실 구석에 있던 바를 끌고 오게 해 객석과 무대의 구분을 만들고, 소품들을 섬세하게 배치해 드라마의 완벽한 배경을 꾸민다. 그리고 끌레르에게 외친다. “치장해(embellis-toi)!” 이상화하고 미화하여 아름다워지라는 이 명령은 드라마적 과장을 곁들여 ‘연극을 하라는’ 지령으로 탁월하게 연결된다. 그리하여 반짝이는 드레스를 반쯤 걸친 끌레르는 온 몸을 놀려 고전비극 배우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러나 드라마적 연기는 모방과 가장을 기반으로 하는 ‘사실임직함’의 층위에 남아있을 뿐 ‘사실’ 자체가 아니므로, 도리어 그 연기 너머에 있는 실제 배우의 얼굴을 언제나 또 한 편으로 간직하고 있을 수밖에 없지 않던가. 그리하여 끌레르의 ‘실제 얼굴’은 은밀히 마이크 줄을 감아쥐며 상자를 뒤지는 마담을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찰나에 뒤돌아본 마담에게는 자신을 향한 그 살해 시도조차 연극일 뿐이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끌레르를 세워두고 프로시니엄 바를 관객 바로 앞까지 끌어온다. 그리고 관객을 마주 보고 다시 앉아서 끌레르의 마이크 줄을 스스로 목에 감고는, 아주 극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하는 한 여인을 연기하고 마는 것이다. 끌레르는 여전히 실제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으나, 묘하게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친절한 프로시니엄 틀을 마주한 채 처음으로 비로소 ‘진짜 객석’에 앉아 ‘진짜 연극’을 보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이 마담을 만족스럽게 하였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죽음을 맞이한 마담은 흡족한 마음으로 샴페인을 마시러 간다. 가혹한 현실 속에 하녀들만 남겨두고 떠나가는 그녀는 “계속해!” 라고 무심히 외친다. 그들에게는 삶인, 죽음 같은 연극을.
다시 돌아온 쏠랑쥬가 분노에 찬 몸짓으로 바를 치우면, 웅장하게 대사를 읊던 끌레르는 프로시니엄 바깥에 노출된 채 문득 현실을 깨닫고 치를 떨며 운다. 그리고 바 안쪽에서 쏠랑쥬는 극적 연기를 이어간다. 프로시니엄의 이쪽과 저쪽에서 삶과 연극을 호흡처럼 넘나들며 고통 받는 그들의 몸이 새삼 공간을 깨우고 있다. 연이어 그들은 의자를 배열하면서 버스가 달리는 도로 위로, 또는 기차가 달리는 평원으로 그 공간을 바꿔보려 한다. 그러나 다시 한 순간 그 지하실은 피할 수 없는 잿빛 일상으로 되돌아온다. 핏자국이 지워지지 않는, 결코 떠날 수 없는 삶의 자리에서 그들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다. 그리하여 끌레르는 다시 마담놀이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가장 연극적이고 드라마적인 방식으로. 그러나 대사 사이사이에서 벌벌 떠는 그녀의 뒷모습이 관객들에게 처절하게 노출되고 만다. 이처럼 가면 쓴 얼굴과 실제 떨림 모두를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은 끝없이 이중적인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을 터. 실제 자체를 연기한다는 것의 불가능성과 역설을 딛고 이 작품을 위해 기꺼이 발가벗겨진 배우들에게 깊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중 삼중의 겹침을 온 몸으로 감당한 그들은 헝클어진 머리에 땀범벅을 하고, 그토록 많은 균열들을 아로새긴 채, 배우로서의 실제 얼굴마저 담보로 한 아슬아슬한 과업을 매우 잘 수행해냈다. 그랬기에 우리는 연극 속에서 그들을 ‘하녀들’로서 뿐 아니라 그들의 ‘고유한 이름’으로도 인식하고, 나아가 그들을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배우들’로서까지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극’은 작품 속에 숨겨진 또 하나의 메타포다. 그들의 열악한 환경이나 사정은 그 공간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익히 인지할 만한 것인데, 처음 그곳을 찾는 관객들은 지하실에 들어서자마자 ‘극장이랄 수도 없는’ 그 허술함에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극단은 이번 작품에서 얼마간 노골적으로 자신들의 그러한 현실을 하녀들의 상황에 투사시킨다. 마담은 확성기에 대고 <연극평론>에 실린 한 편의 글을 읽는다. 그 평은 그들 연극에 대해 얼마간 호의적인 몇 안 되는 글 중에 하나로, 지하실의 상황이나 그들의 작품 등을 거칠지만 의미 있는 부단한 투쟁으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담은 그 글을 비꼬면서 하녀들을 조롱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부분이 이 공연에서 거의 유일하게 관객들의 웃음을 이끌어내는 장면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척이나 자조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뭇 자조적임이 과장된 엄살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하녀들처럼 그들의 연극 또한 관객에게 실제 자체로서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열악한 삶의 상황이 그들로 하여금 주네의 작품을 가장 낮고 처절한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게끔, 연극과 삶이 끝없이 교차하는 하녀들의 순간순간이 사실은 우리 모두의 순간들임을 진정 이해하게끔 도와주었으리라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마담은 끝까지 잔인하다. 자신의 죽음 장면마저 드라마로 만들어버린 그녀는 “나는 그이를 만나러 가요.” 라며 흡족하게 떠나간다. 그녀에게는 연극과 현실이 그렇듯 분리될 수 있는 것인 까닭이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연극이란 얼마든지 기쁘게, 유유히, 버려두고 떠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녀의 마지막 대사인 “마담, 도망간다!” 는 언제든지 삶으로 도피해버릴 수 있는 그녀의 자유를 암시한다. 쏠랑쥬의 분노는 바로 여기서부터 비롯된다. 그녀는 살인에 실패한 끌레르에게 외친다. “너 그 여자가 얼마나 찬란했는지 못 봤지?” 쏠랑쥬가 보기에 마담에게는 하녀들이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삶과 연극이 따로일 수 있는 ‘끔찍한 행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마담에게는 ‘죄가 없기’까지 하다. 달리 말하자면 삶과 연극을 분리할 수 없음은 그들에게 죄악인 것이다. 그리하여 “어디로 가? 어떻게 살아?” 하고 울부짖는 그들 앞에서 결코 떳떳할 수 없는 우리 관객들 역시, 연극이 끝나면 그들을 버리고 공연에 대해 이런저런 무심한 말들을 뱉으며 삶으로, 죄 없는 척, 도망가 버리지 않던가.
요컨대 하녀가 하녀인 것은 그 가없는 겹침 속을 결코 헤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쟁취할 수 있는 ‘마지막 위대성’은 단지 커튼콜 때 의자 위에 올라서서 인사를 하는 것 밖에는 없다. 그리고 그 위대성은 공허하다. 왜냐하면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다시 의자를 내려와 다음 연극을 준비해야 하는 삶의 쳇바퀴 속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쏠랑쥬는 레드 제플린의
쏠랑쥬는 황급히 의자들을 펴들고 다시 처음처럼 객석을 배열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조명을 하나, 둘, 꺼버린다. 그러나 공간의 세팅이 맨 처음으로 되돌려졌다는 것은 언제나처럼 연극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암시한다. 다시 불이 켜지면 쏠랑쥬는 객석에 숨어 떨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살인에 대한 공포로 인하여? 그녀가 죽인 것은 끌레르인가, 무슈인가, 아니면 마담이었던가? 혹 끌레르는 또 다시 살아, 쏠랑쥬의 옆에서 함께 두려워 떨고 있을 것인가? 만일 끌레르가 죽은 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무슈 역시 죽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노란 상자 아래 깔려있는, 하녀들이 그토록 마담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썼던 그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부재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원작에서의 무슈의 부재는 이 작품에서 죽음이라는 완전한 부재로 대체되었는데, 사실은 죽어버렸다고 가정된 무슈 자체가 부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으로 인해, 결국 욕망과 치욕과 공포의 대상, 즉 하녀들로 하여금 연극을 시작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버린 그 대상이 부재하는 것에 불과했으리라는 암시가 덧붙여진다. 요컨대 하녀들의 연극은, 그들의 삶은 부재 위에 세우는 모래성에 불과하였다. 거기서 우리는 빠져나왔고, 그들은 남아 있다. 연극은 끝없이 시작되고 그들의 삶은 그렇게 반복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처절하고 진실하게, 모래성 위로 또 다시 밀려오는 파도를 매순간 두려워하며 떤다.
지난 두 해 연속 아비뇽 연극제에서 공연을 올린 안젤리카 리델(Angélica Liddell)이라는 스페인 연출가를 통해 필자는 처음으로 ‘극한으로 몰아가기’라는 개념을 고찰해보게 되었다. 가령 2010년 한 성당 마당에서 올려진 그녀의 연극에서는 사랑에 상처 입은 세 여인이 아무 말 없이 수십 개의 소파를 나르고 다시 무대 밖으로 가져가거나, 수십 개의 흙주머니를 나르고 그것을 부어 흙무덤을 만든다. 길고 큰 소파들을 다 나르기까지, 무거운 흙더미를 다 나르기까지 추위에 떨며 그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관객들은 그들과 고스란히 같은 시간을 겪었으며, 그 무거움과 처절함을 온전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때 지켜본다는 것은 함께 살아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많은 동시대 공연들은 연극을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연극이란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등을 의문에 부치는 실험을 거듭한다. 그런 류의 작품이 일삼는 ‘경계 놀이’는 경계 내부에 안착한 드라마 연극도, 마음 놓고 경계를 빠져나간 퍼포먼스나 개념 작업도 아닌, 아슬아슬하고 처절한 줄타기에 가깝다. 그리고 사실상 무언가가 꿈틀대고 일어나는 곳은 언제나 그 경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연출가 김현탁은 오늘날 한국 연극계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연극을 벗어나기와 연극 안에 머물기 사이의 치열한 놀이를 감당하는 동시대적 흐름에 발맞추고 있다. 그의 연극에서 우리는 연극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어지러운 분열과, 우리 몸과 감각을 극한까지 몰아가는 수많은 물질들을 만난다. 귀를 찢는 마이크 소리, 던져지는 몸, 날라지고 쌓이고 쏟아지는 의자들, 얼굴에 부어지는 핏물, 그리고 헐떡이는 숨소리. 그로 인해 김현탁의 <하녀들>은 단순히 하녀들과 연극을 병치시키는 개념적인 장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에너지들과 넘치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통해 수많은 의미의 겹침을 만들어내고, 최종적으로는 우리들의 삶으로까지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연극은 처절하게 외친다. 비록 지하실에 갇혀 반복의 쳇바퀴를 도는 하녀들처럼 비천하고 희망 없을지라도 그토록 아름답게, 치열하게, 경계 위에 있자, 도망가지 말자, 그리고 살아있자고.
계간 연극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