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stival d’Avignon 2011

젊은 안무가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를 협력 예술가로 내세운 2011 아비뇽 페스티벌은 그 때문인지 예년에 비해 무용 공연을 큰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는 음악가 출신 연출가 크리스토프 막탈러(Christoph Marthaler)와 극작가 올리비에 카디오(Olivier Cadiot)를 협력 예술가로 하고 ‘뒤섞기(mélanges)’라는 주제를 택했던 지난해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축제 전반을 다채로운 혼합으로 특징짓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나아가 무용과 연극을 거의 동일한 비율로 선별한 기획의 과감함은 관객들의 시선을 배우나 무용수의 ‘몸’들로 다소간 돌리게 하는 데 기여했다. 실로 이번 축제 기간에는 연령과 성별, 심지어 프로와 아마추어를 불문한 수많은 몸들이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고 춤을 추었다. 이 시대의 예술이 춤을 권하는, 사람의 몸이 거기 있어, 기교나 치장을 모르는 위대한 걸음걸이로 무대를 채우며 한 여름을 뜨겁게 기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개막 전 무료공연이었던 안-카린 레스코(Anne-Karine Lescop)의 <질료에 관한 소박한 기획(Petit projet de la matière)>은 동명의 기존 안무작에 ‘소박한’이라는 타이틀을 덧붙여 초등학생 아이들로 무용수를 바꾼 작품이었다. 마치 눈 먼 이가 앞을 더듬듯 한 소녀가 손바닥으로 허공을 가만가만 짚으며 걸어 나오면 옆에 서 있던 키 큰 소녀가 조심스레 그녀를 안아 올린다. 아이들의 몸은 서로 기댔다가, 두 다리를 위로 뻗은 채 누웠다가, 푹신하고 커다란 모래주머니에 무방비로 파묻힌다. 한 번도 춤을 배워본 적 없는 그들의 작은 몸짓은 그렇듯 축제의 서막을 알리는 경이로운 춤으로 펼쳐진다. 그 소박한 기획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그들이 억지로 춤이라는 것을 만들어 추거나 꾸미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만 의연하게, 무심하게 걸을 수 있기만 하다면 그 걸음이 바로 자신만의 춤이 될 수 있음을 그 아이들은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똑같이 아마추어를 무대에 올린, 그러나 이번에는 노년의 춤을 이끌어낸 티에리 티유 니앙(Thierry Thieû Niang)의 <...봄!(Du printemps)>에서도 엿보인다. 한 고등학교의 커튼이 쳐진 체육관에서 스무 명 남짓 되는 노인들이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에 맞춰 큰 원을 그리며 걷는다. 걷다가, 멈추어 서기도 하고, 뛰어다니고, 비켜서고, 누군가는 원을 이탈해 다리를 쉬이고, 누군가는 계속 달리며 옷을 벗고, 큰 숨을 쉰다. 그리고 여기서도 우리는 춤추지 않음으로써 이루게 되는 가장 완전한 춤을 본다. 쪼그라든 가슴을 드러내고 달리는 붉은 머리의 할머니와 종내에는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백발의 노인들. 그들의 몸은 제물이 없는 제전, 제전이 없는 봄을 가시화한다. “우리 모두는 춤추는 존재입니다.” 안무가가 말했듯, 존재의 몸을 찾은 그곳이 바로 그들의 봄날이다.

한편 이번에는 삶의 풍파에 시달린 메마른 청년의 몸을 본다. 파트리스 셰로(Patrice Chéreau) 연출 욘 포세(Jon Fosse) 원작의 연극 <나는 바람이다(I am the wind)>는 흙빛 바닥과 고요한 푸름 속에 두 청년의 고독을 담는다. 깡마른 상체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한 청년에게 또 다른 청년이 다가와, 벗은 몸을 끌어안고 자신의 팔과 그의 팔을 한 짝씩 같은 소매에 끼워 천천히 옷을 입힌다. 그리고 그를 살리기 위해서, 그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싫어? 그들이 내는 소리가 싫어? 너는 침묵이 좋아? 혼자는 싫어? 어째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어? 어디에 있어? 너는 어딨어?” 그러나 벗의 처절한 문답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는다. 아니 사실 처음부터 이미 그는 죽은 자였다. 연극은 시간을 넘나들고, 둘은 뗏목 위에서 항해를 하던 죽음 직전의 순간으로 거듭 되돌아간다. 그럴 때면 진흙 같던 무대 바닥에서 커다란 판자가 솟아나고 그 아래는 어느덧 물이 넘실댄다. 하늘까지 번지는 파문. 그러다 배 위에서의 고독을 이기지 못한 그가 죽음으로 뛰어들면 판자는 다시 바닥으로 사라지고 물도 전부 빨려 들어가고 없다. 어느덧 없고, 여전히 있는 그의 마른 몸.

그처럼 무대 위의 이미 없고 아직 있는 몸들의 가시화는 우리의 생각들을 헤매이게 한다. 가령 춤추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자신 그들처럼 순전하기를, 때 묻지 않은 걸음을 걷다가 아무데서나 무작정 엎어질 수 있기를 꿈꾼다. 반면 노인들의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에게서 풍기는 깊은 절제와 그럼에도 간혹 베어나는 수줍음으로 우리를 건드리고, 청년들의 공허한 시선은 그 고뇌의 언저리를 함께 서성이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예술이 꿈꿀 수 있는 모든 나이와 모든 인생의 몸들이 거기, 그 여름의 아비뇽에 가득했다는 얘기다. 무엇이 아름다운지, 무엇이 희망이고 무엇이 절망인지, 얼마나 덧없는지, 판단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다만 펼쳐져 있는 어지러운 꿈. 그렇게 그들은 따로 또 같이 우리의 현실을 휘저어놓는 뼈아픈 편린들이 된다. 이것은 절망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안젤리카 리델(Angélica Liddell)의 <인간을 신뢰하는 인간에게 저주 있으리(Maudit soit l'homme qui se confie en l'homme)>에는 프랑스어 알파벳을 공부하는 아이들이 나와, 살아가는 동안 울면서 배우게 될 세상의 모든 절망을 알파벳으로 바꾸어 노래한다. 그들이 천진한 목소리로 암송하는 알파벳은 돈(Argent)의 A, 고통(Douleur)의 D, 분노(Haine)의 H 등이다. 곧이어 어린이(Enfant)의 E를 타이틀로 하는 장면에서 다음 문장이 울린다: “나는 좋은 어른이 된 단 한 명의 어린이도 알지 못한다.” 또 다른 장면에서는 한 여성이 단단한 목소리로 외친다. 하루 중에 들을 수 있는 유일하게 신실한 문장은 중국인 가게에 가서 나누는 다음의 대화라고: “빵이 남아 있나요?” “네.” “얼마입니까?” “60 쌍띰입니다.” 무대에는 박제된 토끼들이 놓이고, 나뭇가지에는 찢겨진 책장들이 펄럭이며, 중국인 아이들이 아크로바틱 묘기를 펼치고, 스페인 남녀는 벗은 몸으로 숲을 거닌다.

그러나 그 절망들 사이로 이따금 빛이 비치기도 하는 것이어서, 한 장면에 이르자 질펀하게 굳은 흰 밥이 쌓인 밥상을 사이에 두고 중국인 소년과 노란 옷의 스페인 여자가 마주 앉았다: “왜 울어요?” “내가 낳지 못할 아이들을 생각하느라.” “이제부터는 나를 생각하세요.” “나는 날마다 너를 생각해.” 또 한 편으로는 슈베르트를 연주할 수 있는 선함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노라는 선언을 뒤로, 무대 한 켠의 피아노에서 잔잔하게 슈베르트가 연주된다. 그 희망에는 물론 자조적인 색채가 섞여있지만, 그럼에도 무대 위의 슬픔 속에서는 따스함이 느껴진다. “충분히 울지 못한 자는 미처 알 수 없으리.” 그들이 울었을 충분한 울음에, 울면서 배웠을 모든 것들에 얼굴을 파묻고픈 공감과 연민을 느낀다. 이것은 절망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인간의 지리멸렬함에 대한 자조는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의 <신의 아들의 얼굴의 개념에 관하여(Sul concetto di volto nel figlio di Dio)>에서 극에 달한 물질성으로 표출된다. 놀랍게도 이때 물질은 오페라 극장 무대 위에서 소파를 적시고 바닥까지 떨어지는 노인의 누런 똥이다. 일터에 나가야 하는 아들은 양복 윗도리를 벗고 늙은 아버지의 똥을 치운다. 돌아서면 또 똥을 싸고 새 기저귀를 또 다시 버리는 아버지, 치워도 치워도 바닥에 흥건한 물똥의 흔적, 달래기도 지치는 비참한 노인의 울음, 인간과 그의 배설에 대한 혐오, 곧이어 따라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인해 마침내 사람의 아들은 신의 아들의 얼굴 앞으로 간다. 무대 뒤편에 커다랗게 그려져 있던 그리스도의 얼굴이 문득 처절한 그들의 현실 위로 환상처럼 부상한다. “예수, 예수…” 그 이름을 부르는 아들의 절망스런 뒷모습과 공명하는 목소리는 언뜻 구원을 연상시켜, 똥처럼 뭉개진 인간의 마음이 비로소 신의 아들의 얼굴 앞에 간절히 무릎 꿇는 최후를 엿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안식인지 또 다른 자조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아들이 퇴장하자 배낭을 메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걸어 나온다. 무대 한 쪽 침대 위에는 똥칠을 한 노인이 머리를 감싼 채 앉아있고, 아이들은 노인의 복수라도 하듯 그리스도의 얼굴을 향해 수류탄을 던진다. 수류탄이 장막에 부딪칠 때마다 엄청난 굉음이 울린다. 아이들의 배낭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류탄이 전부 그 얼굴을 명중하기까지, 관객은 똥냄새를 감당하던 예의 그 인내를 품고 그렇게 무대를 바라본다. 끝으로 아이들과 노인이 무대를 떠난 뒤,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겪어낸 끝에,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다음의 글자가 떠오른다: “당신은 나의 목자이십니다(목자가 아닙니다).” 이것은 절망인가, 아니면 희망인가.

축제 기간 중 ‘대재앙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comment sortir de la catastrophe)’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로베르토 베니니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가 미처 놓쳐버린 가장 멋진 결말을 언급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만일 그간 아버지가 게임으로 포장했던 수용소의 진실을 어린 아들이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음이 밝혀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 그처럼 사실은 아무도 믿지 않지만 모두가 믿는 척 가장함으로써 사회를 지탱시킬 수 있는 일종의 허황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는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Je sais bien, mais quand-même)’의 논리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도 목소리를 높인다. 그 무언가(대재앙)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 그리고 이는 앞서 언급한, 그 무언가(믿음 또는 희망)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체하는 모습과 병치된다.

요컨대 그 강연에서 지젝은 대재앙을 벗어나는 비법을 말하기보다, 자신이 관찰한, 대재앙을 곁에 둔 채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편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얼핏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 편린들은 어쨌든 ‘살아가기 위한, 삶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방향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번 축제의 공연들은 말하자면 그러한 편린들 사이를 진동하는 몸들로 채워져 있었던 듯하다. ‘지금, 여기’를 고민하는 연극이 바야흐로 ‘대재앙의 시기’로 오늘을 진단할 수밖에 없었음은 자명한 바, 그 자리에서 예술은 삶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끝없이 진동하고 있었으며, 우리는 그 사이사이를 수놓는 전 생애의 몸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번 축제의 주제인 ‘예술 학교(Une école d’art)’를 제목으로 한 소책자에서 예술 감독 뱅상 보드리에(Vincent Baudriller)는 보리스 샤르마츠를 협력 예술가로 선택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는 춤의 통상적인 코드를 뒤틀어 강렬하고도 예기치 못한 몸의 상태를 찾아내며 구체적이고도 시적인 글쓰기를 도모하는 그 안무 작업에 있어서, 그리고 공연 예술의 제요소에 의문을 제기하는 역동적인 예술가적 탐구에 있어서, 언제나 한 사람의 무용수이다.” 그리고 만일 그러한 것이 춤이라면, <...봄!>의 안무가가 말했듯 우리 모두는 춤추는 존재가 맞을 것이고, 그런 한에서 예술은 언제나 우리에게 몸짓을 가르치는 학교가 되며, 그것은 샤르마츠의 개막작 <어린이(Enfant)>의 사진 위로 한 신문이 커다랗게 새겨놓았듯 ‘예술의 유년(Enfance de l’art)’에 바쳐질 몫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셰로의 연극에서, 행여 어린 날은 어땠는지, 어린 날에도 그처럼 쓸쓸했는지 하는 질문에 깡마른 사내는 답한다: “그땐 움직임뿐이었지.” 그리고 마침내 삶의 피안으로 넘어간 그는 이제 다시 순전한 움직임으로 환원되었다: “나는 바람과 함께 떠났어. 나는 바람이야.” 우리의 유년, 그리고 삶이라는 예술 학교에서 배우는 그 모든 것들을, 한 쪽으로 쏠려 쏟아져버리지 않고 끝없이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리는 그 진동을, 절망과 희망을 넘나드는 그 움직임 자체로서가 아니라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기억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축제의 아비뇽에는 미스트랄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계간 연극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