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프랑코포니/게릴라극장, 고아뮤즈들, 게릴라극장, 2010.2-2010.3

이미지와 서사 ― 드라마의 귀환

‘텍스트에서 무대로’의 연극적 전환은 20세기 초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진행되어 온 커다란 흐름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것에 대한 여러 논의들이 오늘의 학계를 풍미하고 있으며, 말이나 재현을 넘어서는 몸, 이미지, 여타의 매체들에 대해 거대한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론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로 연극들은 여전히 드라마의 사실주의적 재현을 넘어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물론 우리는 이를 무턱대고 비판할 수는 없는데, 가령 지난 2월 18일부터 3월 7일까지 게릴라 극장에서 공연되었던 <고아뮤즈들>(미셀 마크 부샤르 작, 까띠 라뺑 연출)처럼, 드라마 자체가 갖는 힘이 워낙 막강한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실로 <고아뮤즈들>은 세밀하고 아름답게 직조된 서사적 짜임과 맛깔스런 반전을 동반한 작품이었고, 그 서사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공연의 승부수가 단지 그러한 서사의 재현이나 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독특하게 형상화된 고아 남매들의 집은 무대 전체를 사막 같은 쓸쓸함과 동화 같은 감미로움으로 오묘하게 채색했으며, 이미지와 음악과 춤이 어우러져 만든 효과로 인해 우리는 때로는 말이 없이도 무한한 언어 속으로 잠겨들 수 있었다. 사실상 참된 의미의 ‘포스트드라마’라는 것이 드라마를 폐기해 버리자는 강령은 아닐 것이며, 드라마나 그 서사가 여전히 진정한 연극성에 맞닿아 있고 또 그것이 여타의 요소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과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면, 이와 같은 드라마의 귀환을 비난할 그 아무런 연유도 우리는 찾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사막이라는 무대

소극장 무대의 삼면을 채우고 있는, 이곳저곳이 허물어진 높다랗고 낡은 회벽, 왼편 가장자리 높은 곳에 달려 있는 기울어진 하늘색 문, 그 아래를 내려오는 좁고 가파른 계단, 밖이 거의 보이지 않는 불투명한 창문, 무대 정면 벽에 걸린 작고 초라한 십자가, 막이 바뀔 때마다 위치를 달리하는 커다란 탁자 하나, 의자들, 그리고 무대 앞쪽 바닥에 쌓여 있는 고운 모래들, 모래 사이사이의 크고 작은 돌과 억센 화초들…. 사실상 첫눈에 보기에 하늘색, 흰색, 그리고 고운 모래로 꾸며진 무대는 그 색감만으로는 어느 지중해 해변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문을 열 때마다 몰아치던 모래바람 소리가 가슴을 후비고 도는, 좁고 깊은 사막이다. <고아뮤즈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장소는 유일하게 4남매의 집안일뿐이지만, 이 공연에서 그 집은 이렇듯 헤어날 수 없는 광막한 사막으로 형상화된다. 아래로 깊이 파인 독특한 구조로 인해, 바람이 불어 닥치면 모래는 그대로 집 내부에, 그런즉 그들의 내면속에 쌓여버릴 수밖에 없다. 문을 연다는 것은 엄마를 기다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오지 않는 엄마를 대신해 그들의 삶에 들이치는 모래바람만을 맞아들일 뿐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문이 열릴 때마다 들려오는 서늘한 바람소리는 그 음향만으로도 절망스럽고, 바닥에서 날리는 모래는 조명을 받아 먼지처럼 부산하게 흩어진다. 큰딸 카트린(김소희 분)은 막내 동생 이자벨(강영해 분)을 향해 늘 문을 닫으라고 소리를 치는데, 그럼으로써 그녀는 지긋지긋한 모래바람을 거부하는 동시에 엄마의 귀환을 거부하며, 이는 이후 새로운 가족이 될 자신의 아이들을 잉태할 수 없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더불어 그녀는 엄마의 편지들을 무대 앞 모래더미 속에 묻어둠으로써, 엄마에 대한 모든 환상을 사막 깊숙이 가두어버린다. 한편 나이에 비해 지능이 떨어지고 특별히 언어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나오는 이자벨은 언제나 그 문을 열어놓고 싶어 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는 거리낌 없이 엄마를 기다리고 마침내 스스로 엄마가 되어 떠나가는, 그 사막 같은 공간 속을 가장 자유롭게 누비는 인물로서 나타나고 있다.

그들의 횡단법

네 명의 남매에게는 엄마의 빈자리가 그들 각자에게 드리운 그림자, 혹은 어떤 부채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네 명의 배우는 너무나도 빼어난 연기로 이를 절묘하게 드러내었다. 우선 첫째 카트린에게 있어 그것은 자신이 낳아 기르지 못하는 아이, 혹은 이자벨이고, 둘째 마르틴(함수연 분)은 자기 방어의 일환으로 동성연애자 여군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셋째 뤽(윤정섭 분)은 끝나지 않는 소설을 쓰며 엄마의 스페인 치마를 즐겨 입는 무능한 젊은이이고, 넷째 이자벨은 언어능력 부족으로 언제나 수첩에 단어를 받아 적어야 하는 스물일곱 처녀이다. 그리고 이들 각각은 엄마가 떠나가 버린 사막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만의 횡단법을 찾아 헤맨다. 그러니까 이 공연은, 사막이라는 무대를 횡단하는 가련한 고아뮤즈들의 긴 여행을 우리들의 눈앞에 전시하는 것이었다.
때는 부활절 전야이다. 이자벨의 장난에 의해 네 남매는 실로 오랜만에 한 집에 모인다. “집을 떠나는 건 미래로 가기 위한 거야. 그런데 여긴 과거일 뿐이지.”라는 마르틴의 대사처럼, 그들은 엄마가 아직 그들 곁에 있었던 먼 과거를 함께 회상한다. 이자벨에 따르면 언니 오빠의 속임으로 자기가 여태 죽은 줄 알고 있었던 엄마가 얼마 전 전화를 했으며, 부활한 그리스도처럼 그들을 만나러 부활절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엄마를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자신들을 고아로 만들어버린 엄마에 대한 미움과 애증 속에, 그들은 뤽의 첫 소설인 <스페인 여왕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함께 읽게 된다. 한 편의 극중극으로 제시되는 이 소설 속에서, 그들은 엄마 혹은 아빠의 역할을 하거나, 어린 날의 그들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그 어린 고아들은 페데리코라는 스페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엄마를 감시하기도 하고, 자신들과 엄마를 모욕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을 온 몸에 받기도 하며, 전장에서 전사한 아빠의 소식에 페데리코에게 총을 겨누며 이 집을 떠나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페데리코를 찾아 스페인으로 떠난 엄마로부터 다시금 외로이 버림받기도 한다. 외로움과 슬픔과 미움과, 그들이 견뎌왔던 사람들의 불쾌한 관심과, 도피와 불임과 저능함과 죄의식이, 좁고 깊은 그 집에 가느다란 모래 알갱이처럼 하나 둘 쌓여 그들의 광막한 과거가 되었으며 사막이 되었음을 관객은 목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밤을 통해 그들이 그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느낀다. ‘엄마의 부재’라는 이름의 그 사막을 횡단하는 방법은, 엄마가 드리우고 간 그림자와 짐들을 벗어버릴 유일한 길은, 비로소 그 과거의 공간에 앉아 엄마를 이해하는 것, 그리고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우리 엄마”

여지껏 미움과 증오로 엄마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들의 인생을 지배해온 단 하나의 이름은 바로 ‘엄마’였다. 과거의 모든 사람들을 그들은 오직 엄마를 기준으로만 기억한다. 그들에게 아빠는 단지 엄마의 열망을 채워주지 못했던 무능한 사람이었고, 페데리코는 그런 엄마로 하여금 사랑을 하고 꿈을 꿀 수 있게 해준 남자였다. 마을 사람들은 엄마를 비난하고 곤경에 빠뜨렸던 이들이자 그들의 영원한 복수의 대상이며, 그들 자신은, 엄마를 미워하고 기억하고 연기하고 기다리는, 그리고 그녀를 되살리는 고아뮤즈들인 것이다. 그들의 엄마는, 카트린이 공개한 편지로 인해 스페인이 아닌 퀘벡 어딘가에서 초라하게 살고 있음이 판명된 후에도 변함없이, 자유롭고 아름다운, 그들의 ‘스페인 여왕’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끝끝내 ‘고아’인 이유는, 그들을 뮤즈로 삼아 뤽이 완성했다는 그 소설이 기어코 언제나 ‘엄마의 자유’를 담보로 하기 때문이리라.
한편 극중에서 이자벨은 엄마가 찾아왔을 때 자신이 엄마처럼 말을 잘 하지 못할까봐 끊임없이 염려한다. 그렇지만 그녀는 썩 잘 해내었다. 이 극이 가져다준 마지막 반전이자 최종적인 횡단법은, 부활절 아침 고아들을 찾아온 이가 엄마가 아니라, 바로 엄마가 된 이자벨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엄마가 남기고 간 부채를 자신에게 덮어씌우던 언니 카트린과 허물어져가는 옛 집에 이별을 고하고, 이 모든 사건을 꾸며낼 수 있도록 도와준 뱃속의 아기 뮤즈와 더불어서, 가장 미련해 보였으나 가장 강했던 막내 이자벨은 마침내 그 사막을 떠나간다. 엄마처럼 말을 잘 하면서, 엄마처럼 멋진 옷을 입고. 그리고 떠나가는 그녀를 보며 마르틴은 말했다. “나도 엄마가 저럴 거라고 상상해왔어. 자유로운… 우리 엄마.” 이자벨은 치렁치렁 늘어지는 엄마의 옷을 입고 낡은 계단을 올라간다. 한 계단, 한 계단, 그리고 그녀는 미련 없이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엄마처럼.

다시 이미지로 ― 뮤즈들의 춤

그 어느 해의 마을 축제 날, 엄마와 4남매는 사람들이 가득한 성당에 들어선다. 오르간 연주자였던 엄마는 그 자리에서 ‘라 팔로마’를 연주했고, 사람들은 페데리코를 끌어내 흠씬 두들겨 팼으며, 아빠가 마침내 이별을 고하며 떠나갔고, 그 난장판 속에서 4명의 아이들만이 고요히 춤을 추었다. 이 장면을 회상하는 동안 무대에는 붉은 조명이 가득하고, 장렬한 노랫소리에 맞춰 나이든 고아들이 다시 한 번 무표정한 얼굴로 다만 웅장하게 탱고를 춘다. 그들의 스텝을 따라 무대 앞의 모래들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그 옛날 어느 밤 교회의 아수라장 가운데서가 아니라, 마치 정지된 슬픔 속에서인 것처럼 우리는 그들의 춤을 바라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사막을 떠나갈 때 이자벨이 그들에게 남긴 말은 이것이었다. “이자벨은 오늘… 너희들을 포기한단다.”
공연이 끝난 뒤에, 남는 것은 결국 서사의 치열했던 일희일비라기보다는, 그들의 아름다운 집에 대한 이미지와, 그들의 춤의 환영들과, 모래바람 소리와, 외롭고 쓸쓸한, 사막 같은 그들의 아픔이었다. 엄마의 자유는 성취되었고 이해되었고 심지어 뒤따라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너무나 슬픈 사건이었던 것이다. 뮤즈들이란 본디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신이지만, 언제나 예술의 뒤켠에 쓸쓸히 가리어지는 존재들이 아니었던가. 예술, 다시 말해 자유는 완성되었지만, 우리의 뮤즈들은 외로이 남는다. 그들은 조용히, 아무도 봐주지 않는 춤을 춘다. 어찌 보면 ‘엄마의 자유’라는 주제에 모든 것을 바쳐왔을 저 텍스트와는 달리, 이 공연의 무대 위에서 우리가 진정 보는 것은, 자유의 뒤안에 남겨진 그들의 춤의 이미지일 뿐이지는 않겠는가. 예술이 끝난 뒤에 포기당한, 사막 속에 갇힌 고아들의 춤.

뷰즈 2010 5/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