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원피스를 입은 리델이 뚜벅뚜벅 무대로 걸어 나온다. 푸른 의자에 앉아 잠시 목을 축이고. 긴 치맛자락을 걷어 허벅지를 드러낸 채 지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한다. 투우사에게 필요한 건 두 다리가 아니라 죽고 싶은 마음이라고. 일평생 지속되는 슬픔이 있다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욕망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지난 겨울 거리마다 세워진 간이 무대에서. 때로는 밤새도록. 한 사람씩 나와 말을 시작하는 그 많은 순간을 우리는 지켜보았다. 그들의 손에는 작은 용기와 그들의 전 생애가 쥐어져 있었다. 음색도 떨림도 울분도 희망도 모두 고유한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부끄럽지 않기 위해, 어느 미래에 또다시 과거가 현재를 돕기 위해 나왔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가슴에 이는 파문. 그것을 정동(affect)이라고 부른다. 고요한 정지가 아닌, 동하여 일렁이는 정서. 어딘가로 우리를 데려가 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변화를 추동하는 힘. 요컨대 저 말의 정동으로 인해 어느 미래는 이미 현재의 손길로 구원받았다.

그러나 사는 동안 어떤 순간에 정동을 감각하게 될지는 미리 예견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미리 알 수 없듯이. 언젠가 서툴게 뱉은 한 마디 말이 순식간에 당신의 마음을 식게 할 줄 그때는 미처 몰랐던 것처럼. 살아간다는 것은 굽이굽이 모험과 같다. 그리고 리델은 모험하듯 무대에 오른 것이다. 결말을 아는 픽션 속에 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용기와 자신의 전 생애를 쥐고. 오늘 당신의 가슴이 건드려질지, 모르면서 말을 시작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 그의 작품은 언제나 사랑과 연결돼 있다. 그는 사랑하듯 공연하며, 오직 사랑이라는 주제를 탐색한다. 무대 위에서 그는 사랑하는 자에게 폭력을 당하는 사람. 스스로가 사랑받을 만하지 않다고 믿고 있는 사람. 혹은 누군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환각에 빠진 사람. 인간을 혐오하지만 여전히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사람. 사랑의 저열함과 경이로움, 불경함과 성스러움을 모두 아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꼿꼿이 서서 머리에 술을 들이 붓고 흙더미에 몸을 부비고 칼로 자해하고 뱃속에서 괴상한 소리를 길어 허공에 대고 울부짖으며. 그는 때에 따라 고대 로마의 뤼크레스를, 피터팬과 웬디를, 대규모 여성 살해가 일어난 멕시코 북부 도시 생존자들을, 문화대혁명 시절 탱크 앞에서 춤춘 남자를, 상하이 거리에서 왈츠를 추는 중국인 커플을 무대로 소환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는 투우를 통과하여 구체적인 질감을 얻는다. 리델에게 투우는 언제 도래할지 모를 죽음 앞으로 걸어가는 일. 어느 순간 소의 눈이 어떤 빛으로 반짝여 자신을 향해 돌진할 것인지. 그 황홀한 찰나를 애타게 갈망하며 그는 마타도르의 신을 신는다. 그때가 오면 놓치지 않고 소의 발밑에 검을 떨어트릴 준비를 한 채. 그는 항복하고 싶다. 그는 정동이 밀려오기를 고대한다. 투우와 사랑과 연극은 그렇게 하나가 된다.

이 대결에서 그는 늘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한다. 그래야 싸움이 공평하기 때문이다. 소가 소인 것처럼. 관객이 관객인 것처럼. 리델도 자신의 몸을 끌고 나와, 낡고 슬프고 분노하는 얼굴로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의 무참한 배설이, 그 태도와 내용이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그는 흠모하듯 폭력과 사랑을 위험하게 연결 짓는다. 그는 자아도취에 빠져 있고 이는 자기연민으로도 이어진다. 그 모든 치졸함을 그는 숨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말이 언제나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는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한다. 그는 관객의 이해를 거부한다.

문제는 관객으로서 우리가 그를 이해하고 싶어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공연이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말은 얼마나 이성적인가. 리델의 말을 들으면서 가령 폭력과 사랑의 연결성에 대해 관객의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질 때. 사유를 통해서라면 명백히 정리되는 어떤 위험성이 특정 생의 감각 속에서는 처참히 무화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진정 이해하려면. 투우사가 소의 눈을 보듯이 우리도 그를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혼과 영혼이 마주보듯이. 그의 몸이 바닥을 기면 우리의 영혼도 바닥을 기고. 그가 춤을 추면 우리도 춤을 추면서. 투우에 참여하듯이.

무대 위의 그가 때로는 그토록 저열해 보이는 까닭은 그가 다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매끄럽게 정돈되지 않는 존재다. 사람은 세계의 질서에 포섭되지 않는다. 사람은 질서를 깨뜨리고 거듭 달아난다. 정동은 오직 그런 때에 일어난다. 질서 속의 안전한 슬픔은 정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조금 불쌍히 여기고 눈물을 닦은 뒤에 질서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지난 겨울의 말들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듯. 리델의 말도 안온한 푸념이 아닌 것이다. 세상을 찢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죽고 싶은 것이다.

이따금 음악이 들려오고. 통상적인 경우와 달리 이 공연에서는 음악조차 우리에게 도피처가 되지 못한다. 피차 모든 음악은 고통에 관한 것이 아닌가. 울게 하소서. 헨델의 한 오페라에서. 납치된 여자에게 납치범의 동료가 위로를 건넬 때. 그 위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납치의 질서 속에 남아 있는 일. 여자는 위로를 거부하고 자신을 그냥 울게 내버려두라 노래한다. 여자는 불화를 택한다. 

우리는 리델을 울게 내버려둔다. 그러다가 혹 정동이 일거든 오늘 극장을 나서는 일이 끝내 쓰러진 소의 죽음을 그 하얀 피를 목도한 뒤 투우장을 나서는 일처럼 세계를 조금은 달리 보게 하지 않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