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식의 각색 <햄릿>에 관하여 (2022.8)
“죽음, 죽음… 죽음이 죽음을 부르니,
천지사방에 온통 죽음뿐이로구나.”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거트루드는 클로디어스가 영국 왕에게 보낸 밀서의 존재를 모른다. 그는 죽은 남편의 슬픔과 아들의 분노와 왕의 욕망을 돋우는 도구로, 세계를 판단할 주체적 시선을 갖지 못하고, 다만 궁지에 몰려 신음하다 타인의 독배를 대신 마신다. 그런 그에게 배삼식은 새로운 장면과 대사를 준다. 원작 속 왕과 시종, 햄릿과 호레이쇼의 흩어진 대화를 모아, 이번에는 호레이쇼가 왕비에게 고한다. 왕이 햄릿을 죽이라는 밀서를 썼노라고. 함정을 빠져나온 햄릿이 벗들의 목숨을 넘겨주고 바다를 헤엄쳐 돌아왔다고. 거트루드는 알아본다. 죽음이 죽음을 불러, 이 덧없는 세상에서 모두가 죽겠구나. 햄릿이 그랬듯 주체가 된 그가 세계의 허망한 가상성을 직시한다.
테아트럼 문디(Theatrum Mundi). 세계는 극장이며, 삶은 연극이다. 셰익스피어의 시대를 풍미했던 저 표어는 배삼식의 각색에서 <햄릿>의 주제 자체로 떠오른다. 극의 시작과 끝, 어두운 무대 뒤편 인물들의 실루엣이 일렁인다. 유랑극단의 배우 넷이 앞으로 나와 작품을 연다. 특별히 마지막 결투 씬은 극히 양식적인 형태를 띤다. 마치 또 하나의 극중극처럼, 인물들은 짜 맞춘 듯 역할을 다하고, 다시 광대들이 나와 왕자의 임종을 지킨다. 이것은 연극이다. 햄릿은 알고 있었다. 삶이란 한낱 무대 위의 놀음인 것을. 그리하여 복수는 때로 무가치했고, 사랑은 여전히 가슴 아팠다. 그리고 모든 연극은 반드시 끝난다. 이때 모든 삶이 또한 연극이라면, 우리의 삶도 끝나고 말 것. 결국 “천지사방에 온통 죽음뿐”이다.
다만 이것을 말하기 위해, 각색은 마땅히 추상화된다. 본질적인 것, 시공을 초월하는 것들이 원작으로부터 남겨진다. 말들은 간결해지고, 보다 적극적으로 시가 되어, 마침내 노래가 된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공처럼 굴려 주고받는 경쾌한 광대놀음이 펼쳐진다. 이때 역설적으로 감각은 도드라진다. 이미 알고 있다 해도 재차 겪는 일들이 아프지 않을 수는 없으므로. 때로 감각만큼 보편적인 것도 없으므로. 햄릿은 “눈을 내리깔고 서성거리며 먼지 속에서” 아비를 찾고, 장례식 때 남아 혼례상에 오른 고기는 “딱 알맞게 식었”다. 클로디어스는 “오월 꽃처럼 만발한 죄를 짊어진 채 지옥의 불길에 휩싸여” 있고, 오필리어는 “종달새가 아니”므로 “가느다란 실가지”가 그를 “견디지 못”한다.
그렇게 연극은 끝에 다다른다. 노래 같은 감각들이 쌓이고 흘러, 말하자면 죽음에 다다른다. 햄릿은 이미 알고 있는 결말을 위해 걸어가 검을 쥐고, 거트루드는 자발적으로 독이 든 잔을 든다. 끝을 내자. 이것은 연극이다. 그들은 예견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런데 여기서 기묘한 일이 발생한다. 최후의 독백을 뱉는 햄릿의 등 뒤로, 죽었던 사람들이 무대에 귀환한다. 결투장에 누웠던 거트루드 클로디어스 레어티즈도 일어나고, 장례를 치른 오필리어가 돌아온다. 인물들은 다시 실루엣으로 서성인다. 이는 자명한 귀결이다. 진정 그것은 연극이었기 때문이다. 가상의 세계에 막이 내리면 거기서 일어난 일들은 없던 일이 된다. 가면을 벗어 손에 들고 사라진 세계를 그저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바깥에서. 죽음 너머에서.
내게 있어 비극에서 제6막만큼 값진 것은 없네.
전쟁에서 죽은 자들 되살아나고,
가발은 빗질되고 치마는 소제되고,
심장에서 검이 뽑히고 목 맨 매듭은 풀어지고,
죽은 자와 산 자가 가지런히 서,
객석을 바라보는 일.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는 「연극에 대한 감상」이라는 시를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슬프게도 여기서 다시 테아트럼 문디는 순전한 비유로 되돌려진다. 삶은 연극을 닮았다지만, 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우리의 삶에는 제6막이 없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누구도 죽은 다음 다시 일어나 인사할 수 없다. 커튼콜 너머로 재개될 바깥의 삶은 없다. 삶이라는 연극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이 죽을 것이다. 다만 요행히 작금의 무대에서 미처 죽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호레이쇼와 같다. 아직 연극 속에 사라지지 않고 남은 사람. 모든 것을 지켜보았으나 그로부터 빠져나오지는 못한 햄릿의 제일 관객.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배삼식의 <햄릿>은 묻고 있다. 오늘 당신이 객석을 나설 때. 혹은 그저 매일의 현실 속에서도. 진창 같은 세계를 목도한 다음 우리는 어떻게 남아 살아가야 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