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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전혀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글을. 그 충동을 따르지 못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박사 논문이라는 거대한 산이 여타의 사유와 문장을 가로막던 시절. 대체로 많은 날들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누워 보냈음에도. 피차 버려질 그 시간에 일어나 다른 글을 쓸 수는 없던. 그게 산에 대한 예의이자 책무이던 날들.

그러는 동안 아마도 생이 유예되었다. 밖은 소용돌이였으나 나의 작은 방 문을 닫으면 고요가 가라앉았다.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 현재적 휘말림이 아닌, 어지러운 춤이 아닌 방식으로 저 소용돌이와 다시 관계 맺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관망할, 애도할 거리가 생길 때까지. 그러나 거리라는 말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공연예술이라는 장르에 얼마나 생소한 것인지. 나는 얼마나 나의 직업을 배반하며 지냈던 것인지.

왜냐하면 공연예술은 시간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존재 방식이 시간에 기대고 있어, 발생하는 동시에 소멸하는 예술. 작품을 다 본 순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없다. 그것은 사라졌다. 남는 것은 기억뿐이며, 기억도 금세 바스라진다. 그러므로 대개 공연에 대한 글을 쓰는 일은 가쁜 호흡으로 이루어진다. 흐릿해지기 전에. 영영 지워지기 전에. 그러나 아무리 현재적이어도 그 글쓰기는 공허를 면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글은 독자가 거의 없다. 사람들은 문학 비평이나 영화 비평을 읽는 것처럼 공연 비평을 읽지 않는다. 글을 읽다 흥미로울 경우 뒤늦게 찾아볼, 작품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심연이 있다. 당신은 내가 본 그것을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을 묘사하는 나의 문장은 당신에게 기어코 낯설 것이다. 나의 흥분은 기이할 것이다. 어쩌면 당신은 독서를 계속할 인내를 품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유예의 시절에, 나는 나를 가슴 뛰게 한많은 공연을 기꺼이 기억의 무덤 속으로 넘겨 보냈다. 충분히 희미해진 뒤에, 말하자면 독자에게만큼 내게도 작품이 비실체가 되었을 때 비로소 글을 쓰기 위해서. 독자와는 조금 더 가까워지고, 작품과는 한없이 멀어진 채로, 이제는 발생을 멈춘 것들을 끝내 뒤돌아보기 위해서. 많은 것이 지나간 뒤에, 이 책을 쓰기 위해서.

이 책에는 2013년부터 2018년까지 6년 동안 프랑스에 살면서,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두 해 반을 더 보내면서 품었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보았던 무대, 걸었던 풍경, 만났던 사람, 못 지킨 죽음, 읽었던 말들과 불렀던 노래가 담겨 있다. 이는 그 모든 지나간 것들에 대한 뒤늦게 쓰인 비평이다.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 유예되고 간직되었던. 어쩌면 삶도 한 편의 공연처럼 흘러가면 그만이기에.

이제 한 시절이 덮였으니 문득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다. 어째서 어떤 슬픔은 발화됨으로써 해소되는지. 나는 그것이 늘 슬펐다. 그러나 그럼에도 말이 되지 못하고 남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들의 모국어로만, 침묵으로만 호명되는 것들. 그러니 나는 아마도 다시 침묵 속으로. 평생을 배워도 다 알지 못할 세계의 아픔에게로.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그 아픔을 들여다보는 친애하는 예술에게로. 모든 것을 빚진, 아름다움에게로.

2021년 10월
목정원

https://www.youtube.com/watch?v=DQJKv-pu5f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