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동, 비밀경찰,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10.1
연극 자체로서의 연극
한 지면을 통해 연출가가 밝혔던 바와 같이, 이번 극단 동의 <비밀경찰>은 명백히 원작인 고골리의 <검찰관> 보다는 메이어홀드의 그것에 더 가까운 공연이었다. 20세기 초반, 연극을 연극 그 자체로서 드러내고자 했던 메이어홀드는 상징적인 무대, 생체역학에 따른 배우들의 기계적인 움직임, 양식화된 연기, 몽타주 식의 이야기 구성 등 각종 실험을 바탕으로 이전까지의 사실주의 연극에 반기를 든다. 그에 따르면 참된 연극성은 텍스트나 현실의 맹목적인 반영이 아니라, 도리어 상징적이고 양식적인 방식으로 현실 너머의 것을 제시해주고 그로써 관객들에게 최종적인 창작의 몫을 남겨주는 데 놓여있었다. 그런즉 메이어홀드를 계승하는 극단 동의 이번 공연에서는 애초부터 텍스트나 내러티브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적다. 우스꽝스런 상황과 익살맞은 대사로 가득한 고골리의 원작에서와 달리, 여기서는 말의 내용이나 사건의 흐름이 여타의 것들에 대해 가졌던 지배력을 거의 상실한다. 바로 그 때문에 이 극은 첫눈에는 매우 난해하고 혼잡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무대의 암묵적인 약속들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이내 엄청난 비밀과 낯선 아름다움이 펼쳐지게 되고, 모든 것이 ‘허깨비’로 귀결되는 종국에 이르기까지, 연극은 오롯이 연극 그 자체로서 남는다.
양식화된 장면들
막이 열리면 흰 한복을 입은 원로회장이 긴 천을 휘날리면서 바람을 헤치고 나아간다. 공간은 좁고 텅 비어 있으나 배우의 몸짓만으로도 넉넉히 폭풍 치는 언덕이 펼쳐진다. 한쪽에는 작업복 차림의 스태프가 선풍기 바람을 쏘여주고 있다. 허우적거리던 원로회장이 가까스로 실타래를 잡으면, 스태프는 연을 장대에 매달아 들고 흔들어댄다. 긴 사투 끝에 연을 받아 쥔 원로회장의 “아~!”하는 비명소리. 이전까지의 침묵으로 인해 그 걸걸한 외침이 더욱 낯설고 절박하다. 뒤이어 그는 고생 끝에 다시 연을 날려 올린다. 언덕 너머 사람들을 다급하게 호출하는 그 소식이, 비로소 동시에 객석에까지 전달된다. “비밀경찰 떴다!”라는 짧은 한 문장. 이 첫 장면에서부터 관객들은 공연이 단순히 고골리의 <검찰관>을 원작에 충실하게 무대화한 것이 아니고, 눈앞에서 펼쳐질 이후의 모든 장면들 또한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게 된다. 게다가 객석에는 여태껏 불이 밝혀져 있었고, 변변한 대사 하나 없이 느린 몸짓과 과장된 표정으로 채워진 이 신이 퍽 길게 이어지는 까닭에, 그들은 불빛 아래 당혹스럽게 남아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난감하다. 어쩌면 이 장면은 일종의 경고와도 같은 것이리라. 오직 연극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다는 연극의 결연한 의지와, 관객에게로 돌려지는 수많은 몫들이, 하나의 도전장처럼 우리 앞에 내밀어진 것이다.
헌데 이 첫 장면은 연극의 내부와 외부를 동시에 드러내기 때문일지, 어딘가 고전적이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이후의 장면들에서 역시 전반적으로 한국적인 색채가 두드러짐에도 불구하고 모두를 통틀어 단지 한국적이라는 꼬리표를 함부로 붙일 수만은 없게 하는 어떤 내적인 양식성이 느껴진다. 매우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정서를 포함하면서, 극의 요소들은 그렇게 시간과 장소를 뛰어넘어 관객에게 그 자체로 즉각 다가온다. 또 창작국악그룹 불세출의 음악과 미술작가 홍시야의 무대미술은 극적인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었다.
장면들의 삽화적 구성과 비밀경찰의 부재
극중에서 삽화적으로 나열되는 주요 장면들은 저 폭풍 장면, 꼭두각시놀음으로 이루어지는 회의 장면, 로터리 클럽 회장 부회장의 비밀경찰 목격담, 급히 버스를 타고 떠나는 이들을 향한 원로회장 부인과 딸의 이중창, 로터리 클럽 회장의 상황 보고, 비밀경찰을 초청한 원로회원들의 버스 위 그림자극, 파티를 준비하는 행렬 장면, 비밀경찰을 접견하는 카트 장면, 그리고 그가 가짜였음이 폭로되는 파티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고골리의 원작을 이렇듯 개별적인 몇몇 장면들만의 짜깁기로 과감하게 축소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이번 공연에서 실제 비밀경찰이 그 모습을 단 한 번도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흘레스따꼬프가 등장하는 원작의 장면들은 거의 탈락되었거나 그의 부재 속에서 진행되었다. 사실상 원작인 희곡 텍스트 내에서 능청스럽고 속물적인 그의 면모들은 큰 비중을 차지하며, 바로 그 때문에 그런 그에게 놀아나는 인물들의 우스꽝스러움은 더욱 통렬하게 풍자된 바 있다. 또 이때 관객과 흘레스따꼬프는 일종의 공모관계를 맺는데, 왜냐하면 관객이 그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고 또 그 터무니없는 행태를 똑똑히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즉 비밀경찰을 탈락시킨 이번 공연의 특이점은 단지 그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기보다, 그 부재로 인해 극중 인물들도, 그리고 심지어 관객들까지도 그가 누구인지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에 놓여있다. 다른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관객들도 이제 어리석음의 자리에 선다. 속물적인 누군가의 꼬임에 넘어가는 것보다, 그 누구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이에게 아첨하고 속임 당하는 것은 더욱 비참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명백히, 그것은 더욱 ‘연극적인’ 일이다.
내러티브의 중단
한편 이밖에 연극적 효과를 위해 끼어드는 수많은 장치들로 인하여, 전체 극의 내러티브는 하나로 흘러가지 않고 뚝뚝 끊어진다. 재현 연극의 오랜 전통에서 그토록 중시되었던 플롯은 여기서 끝없이 단절되며, 심지어 단절된 그 곳에는 아주 길고 아름다운 휴지(pause)들이 넘쳐난다. 정지된 순간들은 음악 같고, 그림 같다. 일례로 원로회원들이 비밀경찰을 만나기 위해 삼거리 모텔로 급히 떠나는 중에, 원로회장의 부인과 딸이 등장해 그들을 붙들며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다. 원로회원들은 종이로 된 버스 창가에 얼굴을 내밀고 여전히 꼭두각시처럼 꿈틀거리고 있으며, 부인과 딸은 그 옆 벽에 붙어 서서 종이인형처럼 팔다리를 까딱거린다. 떠나는 이를 붙잡는 모녀나 그들을 뿌리치고 떠나는 사람들은 모두 매우 다급하고 긴박한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극에서 그 장면은 마치 오래된 테잎처럼 늘어진다. 심지어 매우 구슬프기까지 한 음악에 맞춰 부인이 노래한다. “한 마디만 해주세요. 젊은 사람이에요? 키가 커요?” 원로회장이 딸에게 부르는 답가는 다음과 같다. “나를 닮은 네 눈이 아무리 초롱초롱해도, 사랑스런 네 볼이 아무리 발그레 물들어도, 지금은 안 돼, 나중에.” 이런 식의 유희는 곧바로 이어지는, 로터리 클럽 회장이 두 모녀에게 비밀경찰이 집으로 올 거라는 소식을 전하는 신에서도 이어진다. 그를 맞이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하는 다급한 상황에, 그녀들은 어떤 옷을 입으면 좋을까 다시 재잘거리며 노래를 한다. 헌데 꽃 노랑 원피스를 입든, 꽃 분홍 투피스를 입든, 그것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옥양목 저고리와 월남치마며 고슴도치 브라자는 또 웬 말인가? 다음 장면인 노란 배경 위의 아름다운 그림자극이나, 파티를 준비하며 재료들을 하나씩 들고 이동하는 느린 행렬 또한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들은 천하태평이고, 곱게 내려온 홍등은 저마다의 위치에 걸려 그 몽환적인 실루엣들을 비춰준다. 빠르게 움직여야 할 때 느리게 멈추고, 한없이 다급한 의논이 필요할 때 멍청이 같은 말 주고받기나 일삼으며, 진지한 장면에서는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이 연극의 이토록 지극한 연극적임에 대해 왠지 어떤 경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인형이라는 장치와 극적 허용에 대한 의문
인물들의 연기는 또 어떠한가.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팔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는 인형들이 되기도 하고, 그들의 멀쩡한 얼굴은 탈이나 가면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대사는 대개 외마디 외침이며, 그것도 앞에서 누군가 했던 말을 바보스럽게 되풀이한 외침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들의 말과 그들의 몸짓은 서로 연관이 없다. 어쩌면 그들은 비존재에 가깝다. 그러나 단순한 낯섦을 넘어서, 인형으로 형상화된 인물들은 굉장히 많은 것을 풍자하고 있다. 가령 원로회의 장면에서 담배를 나눠 물고는 정부가 운하를 파려 한다든가 전쟁이 일어날 거라든가 속절없는 논쟁을 펼치는 꼭두각시들이나, 비밀경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어떤 종이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종이인형들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인물들이 각각 카트를 끌고 나와 보이지 않는 비밀경찰을 알현하는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풍자성이나 꼭두각시 같은 그들의 정체성이 조금 흐려지는 경향이 있었다. 또 갑작스레 늘어난 대사들은 이전까지와의 대조로 인해 실제보다 더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헌데 이와 같은 지루함은 현실의 어떤 지리멸렬함이나 사람들의 옹졸함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연극적 장치였던가, 아니면 실제로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으나 어떤 착오로 인해 특별히 지루하게 무대화된 것이었던가? 끝없이 표방되고 있는 저 연극적임이라는 잣대로 과연 이 극의 어디까지를 허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장면이었다.
축제의 의미와 허깨비 같은 연극
명백히 연극이 연극적으로 되는 데 있어 일차적인 목표점은 늘 관객에게 있었다. 관객이 사실주의적인 환영에 수동적으로 빠지지 않고, 연극을 연극답게 바라보고, 또 그를 통해 새로이 현실을 맞닥뜨리도록 하는 것이 현대 연극의 시발점에 놓여 있는 가장 큰 주제였던 것이다. ‘현대 연극의 출발점을 되돌아보다’라는 타이틀을 가진 극단 동의 이번 시리즈는 이런 의미에서 ‘축제 연극의 회복’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무대와 객석이 허울 없이 만나고 서로 무한한 상상 속에 어우러지는, 그런 의미에서의 축제를 말함일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몫을 담당하기에는 이 극은 뭐랄까, ‘너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그림자와 조명들, 노래들, 그림들은, 관객들에게 어쩌면 또 하나의 환상을 제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현실로 돌아와 그것을 새로이 바라보고 또 다른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보다, 그저 연극 속에 하염없이 머물러 있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는, 허깨비인 비밀경찰을 지극정성으로 섬기던 우매한 극중 인물들과 여전히 다를 바가 없다. “아니에요! 그 사람! 비밀경찰! 가짜예요!” 우체국 지소장의 둔탁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사람들이 다시 몸을 꼭두각시처럼 이리저리 휘돌리며 묻는다. “그럼 뭐래?” “아무도 아니래.” “아무도?” “그 무엇도!” “사람이 아닌 거지.” “그럼 뭐야?” “허깨비!” 그리고 마지막 순간, 파티장의 사람들은 모든 움직임을 정지한다. 그들은 심지어 비명을 내지르지도 않는다. 원작에서와 달리 실제 검찰관이 등장하지도 않는다. 막이 내리고, 남아있는 것은 허깨비라는 외마디 외침 뿐. 허깨비, 그것은 바로 이 연극이 비판하고자 했던 현실이며, 그들과 우리가 그토록 기다리던 이의 실체이며, 꼭두각시에 불과한 그들과 우리 자신이며, 그토록 이 극이 돌아가고자 했던 연극 자체이기도 하다. 허깨비 같은 인생을 폭로해주기 위해 스스로 허깨비가 되어버린 아름다운 무대. 그 이미지와 잔향만이 객석을 나서는 이들의 마음에 남았을 뿐이지만, 그것들이 또 다른 참된 축제를 예비하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기를 기대해본다.
뷰즈 2010 3/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