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었다. 9년 전이었다. 아비뇽 연극제에서 프랑스 연출가 알랭 티마르와 한국 배우들이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를 올린 해였다. 상징적인 무대와 간결한 각색, 라이브로 더해지는 한국적인 타악 연주는 이미 원작에 익숙한 프랑스 관객들을 쉬이 사로잡았다. 그러나 그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 곧 배우들의 연기와 언어에 아쉬움이 있었다. 나는 이제 막 연극을 즐겨 보며 글을 쓰기 시작한, 어린 관객이었다. 그 여름 흙빛 성곽 안에는 한국인이라곤 몇 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고, 하루는 그들 숙소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배우라는 족속은 본디 능청스러움을 타고나는 것인지, 식사하는 내내 그들은 의뭉스런 농을 핑퐁처럼 주고받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내가 말했다. “연기를 이렇게 하시면 좋겠어요.”
일순 정적이 흐르고, 모두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그 순간부터 그들은 나를 필요로 했다. 실은 모종의 난관을 모두 인식하고 있었고, 돌파구가 필요했던 까닭이었다. 이후 계속될 투어를 위해 나는 드라마터그로 투입되었다. 함께한 2년 동안 배우들은 언제나 내가 문제를 말해주기를 바랐고, 진심으로 경청했고, 그러면서도 물론, 칭찬을 꿈꾸었다. (이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내가 칭찬만 할 줄 알았다면 우리는 서로 무관해졌을 것이다. 진실을 말하는 입, 그것을 그리워하지 않는 예술가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대개 예술가들은 비평가에 대해 무조건 방어적인 태세를 취한다. 나는 비평가를 안 믿는다, 거나 무려 싫어한다, 라고 대놓고 말한다. (조금 억울한 일이 아닌가. 비평가는 – 가장 신랄한 문장을 쏟아낼 때조차 – 예술가를 싫어하지 않는데 !) 그들이 볼 때 비평가는 실천 영역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갈등, 지극히 섬세한 연기의 결, (비록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나하나 공들여 불어넣은 깊은 의미들, 테크닉들, 현실적인 제약들, 돈과 생계의 문제, 많은 사람의 도움. 요컨대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면 무슨 말이든 함부로 쓸 수 없으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가지 변을 하자면, 첫째, 모든 것을 안다 해도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 사실상 어떤 프로덕션에 깊이 관여할 기회가 있으면, 그때는 대개 많은 것을 이해하기에 불가피한 애정이 생기곤 한다. 그러나 감정의 잔존과 비판적 시선의 엄밀성을 분리시키지 못할 만큼 우리가 직업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둘째, 그 모든 것을 어떤 관객도 알지 못한다. 더불어, 알 필요도 없다. 그리고 비평가는 언제나 무엇보다 하나의 관객이다. 이는 실제적인 사실이며, 상징적으로도 그는 관객을 대표하는 동시에 관객 편에서, 보다 풍성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쓴다. 이때 예술은, 그 모든 알아주었으면 하는 것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뭇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만으로 가닿아야 하며, 무엇보다 결단코, 관객의 무지를 책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물론 비평가는 누구보다 작품이 품고 있는 진실을, 모든 것을 알지 못함에도 잘 읽어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언제나 이해받기를 고대하는 예술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자 하는 비평가 자신을 위해, 그는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어느 날 더 이상 작품의 진실을 알아볼 수 없어진다면? 그 능력을 잃는다면? 무대 위의 그 무엇도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것이 내 앞에서 얼굴을 숨긴다면? 내게로 와 문장이 되기를 거부한다면? 사실 예술가는 비평가를 또 종종 비난하기를, 본인의 감상이 정답인 것을 어떻게 확신하느냐 묻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줄곧 정답이 아니라 진실에 대해 말해왔다. 나는 정답을 파악하지 못할까봐 두려운 것이 아니다. 정답이라는 것이 있다고도 믿지 않는다. 다만 만나고자 하는 것은 일말의 진실. 모든 차원에서 기능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진실이었던 한때의 섬광.
하여 나는 볼로디아처럼 편견을 지우고, 심지어 어떤 공연에 대해 평을 쓸 것이라는 사실조차 지운 채, 작품 앞에 즐거이, 무력하게 마음을 열어젖힌다. 내 가난한 무기인 언어 바깥의,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건드려지기를, 무너뜨려지기를 희망하면서. 살아있는 공연은 그것의 살아있음으로 하여 반드시 분석적 사고와 언어를 비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를 비우지 않으면, 글은 저도 몰래 거짓말을 하게 되고 만다. 그러나 나를 잘 비운 채로 앉아있다가 마침내 작품 자체의 무언가로부터 호명되고 나면, 적어도 나는 – 그것이 나만의 것일지언정 – 하나의 진실로부터 출발할 수 있게 된다. 그 진실을 다시 나로부터 떼어놓고, 거리를 취해 정리할 수 있게 된다. 누군가 그 논리에서 정당함을 발견한다면, 혹 나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 글의 의미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일견 살아가는 일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수많은 타인과 더불어, 다만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물론 누구도 짓밟히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진실을 품고, 때로는 풀어 나누고, 귀 기울여 그 맥락을 가늠하고, 어떤 것에 동의하지 않되 지지하면서. 너의 것은 진실이 아니라고 감히 말하지 않으면서.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볼로디아가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스카르파 역시 여인의 진실을 다 알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통상적인 의미로 축소시킬 수 없는 것은, 슬프게도 비평가와 예술가가 모종의 권력 관계에 놓인다는 사실일 것이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발생한다. 아마도 쌍방향적이지 않은 미움 역시 이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력의 구도를 폐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또한 비평가의 일에 포함됨을 잊지 않은 채.
연극 <비평가> 프로그램북을 위한 글, 20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