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여 café 라는 말을 입 속에 굴려보노라면 많은 풍경들이 내게 밀려온다.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봉지를 붓고 두어 번 휘 저어 마시다가 끝에 가서 만나는 달콤한 농축. 좁고 동그란 탁자를 두고 햇볕을 쬐며 앉아있는 시간. 때로 창밖으로 쏟아지던 비. 그때 읽던 문장들. 어깨 너머 왁자한 목소리들. 우리집 개수대로 흘려보내던, 프렌치프레스의 커피 가루들. 때로는 모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탈취제 역할을 해주던 그것. 또 때로는 식물의 거름도 되어주던 그것. 커피를 달라는 말은 곧 에스프레소를 달라는 말인 나라. 벗들이 커피를 시킬 때 내가 시킨 다른 음료들의 모양. 초코시럽이 발린 잔에 우유를 부어 먹는 쇼콜라쇼나 새빨간 여름의 모나코. 아 그때 그 여름 냄새. 옛날에는 ‘음악’이라는 말 안에, 연주되는 곡 뿐 아니라 그것이 울리는 장소, 듣는 사람들, 그때의 공기와 빛이 모두 포함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파리에서, 나에게 커피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단지 하나의 음료일 뿐 아니라, 시공을 품고 있는 다감한 기억의 총체. 그러므로 언젠가부터 그 음료를 전혀 마실 줄 모르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별다른 슬픔이 되지 않았다.

나는 커피나무가 어디 있냐고 물어보았다, 미미 매거진 3호, 고스트북스, 2019, pp.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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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집이 없는 시절에 이 연극을 보았다. 실은 집도 없고 아빠도 없는 시절. 나 역시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귀국이라는 말 자체에는 집에 대한 함의가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은 시절에.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국의 도시들을 떠돌며 껍질을 잃은 소라게처럼 집을 찾아 헤매이던 원지영이 1년 전 마침내 한국에 돌아왔을 때에도 사정은 비슷했을 것이다. 돌아온 땅에 우리의 집은 없는 것. 우리가 떠났을 때 이미 우리가 살던 집도 소멸하였던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로 돌아왔는가. 집이 없는데, 돌아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이때 부재하는 것은 물리적 공간이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뉘일 숲이기도 하다. 집이 없는데, 돌아와버렸으니. 우리는 스스로 집을 찾아나갈 수밖에 없다.

집을 찾아가는 길 위에서 – 2019 두산아트랩 원지영 <원의 안과 밖 : 탄생비화>, 웹진 연극인, 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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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참사와 그것을 겪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대 위의 재현이 언제나 진실을 비껴갈 수밖에 없음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도, 재현이 가능해서 그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다. 저마다의 방법을 찾아서. 고통받으며. 그 고통을 통과함이 연극에 포함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애도에 포함된다는 것을. 감히 사랑에 포함된다는 것을 말이다.

배우의 자리, 재현불가능한 것의 언저리에서 : 세월호 이후의 연극과 연기에 대해 – <명왕성에서> 프로그램북을 위한 대담 진행 및 정리, 남산예술센터, 2019.5

모든 강의가 퍼포먼스인 것과, 무대에서 실제 강의를 하는 것이 그대로 하나의 퍼포먼스가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엄밀히 말하면 각 경우에 있어 퍼포먼스라는 개념의 범주가 다른 것이다. 전자는 인간이 살아가며 수행하는 일의 연극적 근원을 말하며, 후자는 그럼에도 삶 자체와 구별되는, 누군가 금전과 시간을 들여 고유한 체험을 하기 위해 보러 오는, 어떤 방식으로든 예술적으로 승화된 행위를 지시한다. 두 개념을 쉽사리 일치시키면, 일상의 제 행위를 그대로 무대에 올려도 무방해진다. 모든 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진정 삶과 예술의 등치를 꿈꾸었던 저 70년대의 퍼포먼스에서조차, 예술가는 일상적 행위를 무턱대고 예술적 행위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상적 행위에 예술적 행위의 결을 공들여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노래의 마음을 기억하며 – ‘퍼포논문’ 공연 <노래의 마음>과 강의라는 퍼포먼스에 대해, 서울대 대학신문, 20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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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연극이란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며, 그 세계 속 인물을 이해하도록 하는 근본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해하는 것은 쉽사리 그를 옹호하는 것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연결된다. 여기에 엄청난 폭력과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세계를 만들기 전에, 인물을 제시하기 전에, 연극은 고민해야 한다. 오늘날 관객에게 누구를 이해시킬 것인지.

서울 2019년 봄 – 제40회 서울연극제, 웹진 연극인, 20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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