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뜨료쉬까라고 했다. 몇 해 전 긴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둥근 나무 인형을 내밀며 뱉은 그 이국의 발음이 유달리 귓가에 맴도는 밤이 있다. 팔도 다리도 없이 얼굴과 몸통으로만 이루어진 그 형체는 넘어뜨리면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곤 하던 어릴 적의 오뚝이를 닮았고, 4년 전 폭설 때 옛 학교 운동장 조회대 위에 세워두고 도망 온 나의 첫 눈사람도 닮았으나, 그들보다 조금 더 견고하고 조금 더 천박하고 조금 더 슬퍼 보인다. 풍성한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와 곧 이지러질 듯한 붉은 입술은 워낙 강렬하여 그 속에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그 추운 땅 러시아를, 그 땅에서 언제나 춤을 추고 있을 것만 같은 소녀들을 꿈꾸어보곤 하는 것이다. 작게 그려진 얼굴 외에 다른 부분은 온통 그곳의 밤하늘처럼 새까만 파랑이다. 얇은 붓에 물감을 듬뿍 찍어 그려 넣은 흰 넝쿨무늬들은 소녀를 따라 춤추는 별의 자취인 듯도 하다. 얼굴과 몸통 사이 오목한 부분을 경계로 잡아당기면, 놀랍게도 똑같이 생긴 인형이 나온다. 그 이름도 마뜨료쉬까다. 다시 뚜껑을 열면 또 마뜨료쉬까가 나온다. 친구에게 선물 받은 내 마뜨료쉬까는 여덟. 지금은 물끄러미 그 여덟 번째 인형을 바라보고 있다. 너무 작아서 그리기가 힘들었는지 흐린 얼굴엔 풍성한 속눈썹도 없고 붉은 입술도 윤곽을 잃었다. 열리지 않는 마지막 문을 열고 싶어서, 나는 인형을 돌려가며 뚜껑의 금을 찾는다. 오래 전에 두고 와서 잊은 것이 있었다. 이 문을 지나면 그것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오후 수업 내내 교수님은 재채기를 하고 코를 푸셨다. 매년 이맘때면 손수건을 두 개씩 들고 다녀야 한다시며 수업 중간에 코를 풀러 나갔다 들어오시기도 했다. 멋쩍은 표정으로 자작나무 알레르기라고 말씀하셨다. 그것을 나는 마뜨료쉬까라고 또박또박 말하던 친구의 발음처럼 몇 해 전의 것인 듯 아스라이 들었다. 마뜨료쉬까가 자작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처음 알던 날, 나는 거의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던 것을 기억한다. 자작나무를 가지고 이걸 만들다니! 이 외침 속에는 고작이라는 말이 묻혀 있었다. 내가 자작나무에 대해 늘 막연한 슬픔과 그리움을 품고 있는 건 백석의 詩 때문이다. 그는 白樺라는 그의 詩에서 그가 보는 모든 것을 가리켜 자작나무다, 라고 썼다. 산골 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은 장작도 자작나무, 단 샘이 솟아나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그의 사랑하는 그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라고. 추운 지방에서만 산다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작나무가 그에게는 모든 풍경이었고 고향이었음이 애틋하여, 나는 그의 白樺가 되고 싶은 날이 많았다.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 않아서임을 나는 매순간 이해한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그의 나무로 고작 뚜껑을 열면 또 나오고 또 나오고 하는 러시아 인형을 만든다는 사실이 내게는 원인 모를 경악이었던 것이다. 헌데 이 밤 마뜨료쉬까를 바라보고 있으니 교수님의 재채기가 문득 생각이 난다. 추운 곳에서만 자라는 나무를 괜히 옮겨 심어 온 바람에 이 고생을 한다고 교수님이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을 때, 나는 얼마 전 교정을 걷다가 오래 바라보았던, 흰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진 그 가늘고 높은 나무가 자작나무였음을 이해했다. 에취!
갑자기 재채기가 나고, 여덟 번째 마뜨료쉬까의 문이 열렸다. 그런데 웬걸, 자기보다 더 큰 자기를 뱉어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문은 한 번 열리기 시작하자 밑도 끝도 없이 열렸다. 견고하게 닫혀있는 모든 날의 마음들이 실상 그러하듯이. 열릴 때마다 더 큰 마뜨료쉬까가 나온다. 그 때마다 얼굴과 몸통이 분리되어 내 좁은 방바닥을 뒹구는 고것들을 보면서, 이러다가 내 방이 자작나무 숲이 돼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엄청난 기대에 나는 휩싸였다. 도대체 몇 번째인지 이름조차 붙일 수 없는 마뜨료쉬까가 건장한 사람 크기만큼 자랐을 때에, 마뜨료쉬까 대신, 둥글게 깎인 자작나무 대신,
그가 나왔다.
흑백사진으로밖에 만나보지 못한,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를 사랑하였던, 나의 아름다운 영혼, 나의 자작나무인! 그는 사진에서처럼 흑백이어서 손을 내밀어도 닿을 수 없을 듯한 빛과 어둠 속에 울음처럼 견고하다. 바구지꽃을 보고 흰 당나귀를 보았던, 자작나무를 그렸던 그 눈으로 울음을 터뜨릴 듯한 나의 아픔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아이 같고 소년 같고 아저씨 같다. 그는 야위었고 입을 다물고 있고 평화롭고 눈부시다. 그는, 그는 자작나무다. 문이 열릴 때 그랬던 것처럼, 한 번만 소리 내어 부르면, 한 번만 손을 내밀면 모든 것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코끝이 간지러워짐을 느낀다. 찡그린 표정이고 싶지 않아 간지러움을 꾹꾹 눌러 내리면 다시 또 금방 솟아오른다. 아주 오랜 시간으로 여겨지는 동안 나는 내 안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그 무엇과 싸웠고, 그의 눈은 여전히 아름다웠으며, 에취! 모든 것이 사라졌다. 자작나무, 나의 자작나무가 끝 간 데 없다.
나는 여덟 번째 마뜨료쉬까를 여는 것을 포기했다.
다시 주섬주섬 옷을 입히듯 그 위에 다른 마뜨료쉬까를 씌운다.
나는 자작나무 알레르기가 있었다.
그의 白樺가
한 번도
되어보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