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즈 : 너는 클레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의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렌 : 난 할 거야, 그래야 하니까.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건 진실이 알려져야 하기 때문이니까. 우리에게 그것을 살아낼 힘이 있었건데, 다른 이들에게 그걸 들을 힘이 없단 말이야 ?
프랑수아즈 : 우리에게 과연 그걸 말할 힘이 있을까. 그들은 우릴 믿지 않을 거야. 그들은 우리가 돌아왔기 때문에, 우리가 말하는 만큼 그것이 끔찍하지는 않았겠거니 생각하겠지. 돌아가게 될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증언에 대한 반증이 돼버릴 거야.
1

샤를로트 델보가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을 때 그는 아직 작가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그를 지탱해준 것 중에 특별히, 연극이 있었다. 살과 피로 만들어지지 않은 인물, 그리하여 지치거나 사그라지지 않는 존재, 후에 그가 “유령” 이라 칭하며 추억하게 될 연극 속 인물들이 그와 밤마다 이야기했고, 그를 위로하여 다시 사람의 품으로, 세상의 품으로 돌아갈 힘을 주었다.2 그리고 살아 돌아와, 그는 많은 희곡을 썼다. <누가 이 말들을 가지고 돌아갈 것인가 ? (1974)> 에서 수용소의 인물들은 자신이 살아낸 아픔에 대해, 기어코 돌아간다 해도 끝내 믿어지지 않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돌아가기 이전부터 이미 말을 박탈당한 그들 생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우슈비츠의 참극은 물론 특정 성별에 국한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델보가 그린 여성 수용소, 그 안에서 서로를 살리고, 서로의 죽음을 기억하고, 끝내 진실의 말을 품고 살아 돌아가려 했던 여성들의 초상 속에서 나는 오늘날 우리의 아픔과 공명하는 심연을 읽어낼 수밖에 없다.

비르지니 데팡트에 따르면 여성성의 첫번째 조건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트라우마다.3 요컨대 여성으로 사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품고 사는 것과 같다. 여성으로서 나는 내 몸이 수치를 당했던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 값싼 욕망에 휘둘려 함부로 만져지던 때마다 내 몸에 찢기듯 새겨진 역겨움과 두려움을 기억한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은 아무도 없었지만, 세상은 우리의 비명을 듣지 못했다. 그것을 발설할 수 없도록, 발설한다 하더라도 경청될 수 없도록, 우리의 목소리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이미 세계가 구조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르지니 데팡트는 이 같은 “여성의 조건” 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타인이 우리에게 범하는 일들에 대해 언제나 죄책감을 느끼는 것. 자신이 불러일으키는 욕망에 대해 책무를 지는 존재. 강간은 명확한 정치적 기획이다 : 그것은 자본주의의 뼈대를 이루며, 권력이 행사되는 방식을 직접적이고 잔혹하게 대변한다. 그것은 지배자를 지목하고, 그로 하여금 제한 없이 자신의 권력을 부릴 수 있도록 놀이의 법칙을 설계한다. 절도, 탈취, 강탈, 강요, 그 무엇에 관해서든 지배자의 의지는 아무 족쇄 없이 행사될 수 있고, 그는 자기 폭력성에 취해 쾌락을 느끼며, 이때 지배당하는 자는 저항의 힘을 갖지 못한다. 타자의 존재를, 그의 언어를, 의지를, 총체성을 말살하는 쾌감. 강간은 일종의 내전(guerre civile)이자 정치적 책략이며, 그로부터 하나의 성(sexe)은 다른 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이 된다 : 나는 너에 대한 모든 권리를 취할 것이고, 나는 네가 스스로를 열등하고 타락한, 비난받아 마땅한 존재로 느낄 것을 강요한다.4

여성혐오란 여성의 존재 가치에 대한 멸시를 의미한다. 가부장제는 여성혐오에 기반하며, 그 작동 과정에서 강간이라는 전략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제 의지와 관계 없이 몸을 겁탈당할 가능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남성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람으로 셈해지지 않았다. 무가치했다. 그리고 바디우에 따르면 한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기는 생각과 그 존재를 말살해버리는 행위의 실천 사이는 무섭도록 가깝다.5 그렇게 여성은 죽임당했다.

그들은 그녀를 안 죽이기로 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들은 그녀를 죽이기로 결정했지.6

안젤리카 리델의 연극 <힘의 집 (2009)> 에 나오는 대사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언제나 남성들이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서만 떠들었다. 마치 그녀가 죽임당해 마땅했다는듯이. 사실상 세상은 죽은 여성에 대해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의 존재 자체에 대해 세계는 무관심하다. 살아 돌아온 여성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델보의 희곡 속에서 프랑수아즈가 예견했듯, 그들의 존재는 그들이 당한 치욕을 부정하는 방식으로만 소비되었다. 살아 돌아왔으므로 그것은 충분히 끔찍하지 않았고, 심지어 강간도 아니었다고 세계는 선고했다. 살아 돌아온 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죽어야 했다는 말이다. 지금이라도 죽으라는 말이다. 영영 침묵하라는 것이다. 죽어서도 살아서도 여자는 죽임당한다.

그 세계 속에서 우리는 무력했다. 열등의 조건을 스스로 체화하며 살았다. 세계가 가르친대로 겁탈당한 내 몸을 치욕스러워했다. 스스로를 미워하고 스스로의 자유를 결박했다. 그렇게 가부장제의 명예남성이 되어 제 목을 조르고 있었음을 깨닫는 일은 그 자체로 또 한 번 트라우마가 된다.7 깨닫는 순간부터 눈에 보이는 것들 귀에 들리는 말들이 너무도 뼈아프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이라 믿었던 많은 것들을 부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지했기에 방관했고 무감했기에 동조했던 순간들 속에 나 자신이 또한 가해자였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늘날 많은 여성의 고발을 들을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은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가슴 찢어지는 감정이라기보다, 몸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물리적인 소스라침에 가깝다. 그 몸들의 비명으로 온 세계가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 그 환멸과 피로에 휘청이는 것.

그러므로 몹시 아프고 고단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끝까지 귀 기울인다. 왜냐하면 누군가 기어코 ‘그 말들을 가지고 돌아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2년 전, 세월호 유가족들이 파리에 와 ‘국가 테러 및 재해 희생자 연대 (FENVAC)’ 대표와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를 들었다. 그 연대가 현재 누리고 있는 상식적인 권리들이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유럽 땅에 전무했다고, 기차 사고로 딸을 잃은 한 사람의 싸움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고, 그러므로 오직 유가족만이 끝내 할 수 있다고, 아마도 용기를 주기 위해 그들은 말했다. 유가족만이, 희생자만이,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끌어안고 운다.

연극계 내 성폭력에 대한 대부분의 고발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나는 밀양연극제에 간 적이 있고, 거기서 안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마도 안마만 시키는 것은 아닐 거라고, 모두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고발이 이루어졌을 때, 나는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아득히 자책했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토록 긴 시간 어째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나. 그러다 차츰 다시 반문했다. 알고 있었다고 하여 무엇을 할 수 있었을 것인가. 진실에 대한 고발은, 슬프게도, 오직 피해자로부터밖에는 나올 수가 없다. 피해자만이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인지하며 또 한 번 깊이 아팠고, 고발자들의 세세하고 뼈아픈 진술을 읽다 결국 나는 실제로 아무것도 알지 못했음을 깨닫고 다시 무너졌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들이 기억하는 것, 그들이 살아낸 것. 그것이 내가 몰랐던, 진실이었다.

‘말들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람들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연극이 시작되기 전 프롤로그에서 프랑수아즈는 말한다 : “나는 자명한 것밖에 몰라. 삶, 죽음, 진실. 나는 진실로부터 돌아온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실제였어.”8 성폭력을 고발하는 사람들 또한, 진실로부터 먼 길을 돌아오는 중에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말을 가지고 어디로 가려 하는가. 아마도 우리가 잃었던, 아니 처음부터 우리의 것인 적 없던, 자유롭고 안전한 삶 속으로. 우리가 단지 남성으로 태어났을 뿐인 그 어떤 천박한 이들보다도 하등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 곳, 우리의 존재가 지워지고 무시되지 않는 세계로. 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세계가 비로소 시작되는 곳으로. 우리가 우리의 연극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안젤리카 리델은 <나는 예쁘지 않다 (2005)> 라는 작품에서 세계가 그로 하여금 여성으로서의 자기 몸을 혐오하게 만든 것을 고발하며 “나는 예쁘지 않아 그리고 예쁘고 싶지 않아”9 라고 외친다. 스페인의 한 노래에서 뱃사공이 말하길, 예쁘고 어린 여자들은 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하였다. 여기서 아름다움과 젊음에 관한 가치 평가는 여성을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그리하여 리델은 스스로 예쁘지 않을 것을 택했다. 이는 돈을 내는 주체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 배에 아예 타지 않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배에 타지 않겠다는 말은 세계의 질서 바깥에 있겠다는 말. 그리하여 리델의 연극은 모든 배제된 아픔의 이야기들을 잔혹하고 충동적인 방식으로 무대 위에 난입시킨다.

거리에서 총을 난사할 수 없기에, 나는 무대 위에서 복수한다.10

무대에서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난사되는 총탄처럼 강렬하다. 연극학자 엠마뉴엘 가르니에는 리델의 언어가 갖는 물질성에 주목하면서, 그 “넘칠 듯한 말의 홍수, 억누를 수 없는 다변” 이 우리를 공격하는 것과, 이때 발화의 행위 자체가 “관객을 향해 자기 몸 전체를 내던지는 하나의 몸짓” 이 되는 것을 분석한다.11 요컨대 발화는 그 자체로 고발이자 증언이 되며, 그런즉 수행적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성폭력 고발자들의 말이 갖는 힘이 놓여있다. 그들은 단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파열시키는 것이며, 발화 행위 자체를 통해 이미 온 몸을 던져 변혁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듣는 이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리하여 리델이 세상의 더러움, 헤어날 수 없는 불행, 인간과 사랑에 대한 환멸, 강제된 모성에 대한 역겨움 등을 외칠 때에, 그 고발을 견딜 수 없었던, 혹은 인정할 수 없었던 많은 관객이 쿵쾅거리며 객석을 떠났다. 그리고 남아있는 자들이 연극을 끝까지 보았다. 남아있는 자들이 연극을 끝까지 보았다.

혹여 아직도 누군가는 세상이 그처럼 악하지는 않다고,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모든 남성이 그렇지 않다고 한들 위협 속의 우리에겐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래서 그들은 항변하듯, 저 고발의 언어로부터 귀를 막는가. <인간을 믿는 인간에게 저주 있으리 (2011)> 라는 연극에서, 바로 그 같은 이들을 향해 리델은 말한다 : “그것은 네가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기 때문이야. 너는 네가 충분히 울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너는 아직 충분히 울지 않았어. 너는 오물로 만들어진 거대한 산을 들어올릴만큼 충분히 환멸을 쌓지 못했어. 세계가 아직 네 삶을 덜 부패시켰지. […] 언젠가 네가 충분히 울게 되면, 그때 다시 나를 만나러 와.”12 그리고 충분히 우는 것은 우리가 직접 어떤 사건을 당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겪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감. 애초에 인간은 그것이 가능하기에 연극을 시작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연극의 첫 자리로, 비로소 제대로, 우리는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프랑수아즈 : 이제 나는 여기에 있네. 모든 여자들이 나를 대신해 죽었지. 현실의 삶에서는, 누구도 누구를 대신해 죽지 않아.13

훗날 델보가 회고하기를, 아우슈비츠에서는, 날마다 목도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사실은 나의 죽음일 수 있었으리라는 공포가, 그 슬픔이 온 몸을 지배했노라 했다. 저것이 나일 수도 있었지만 저 사람이 죽음으로써 나는 아직 살아있는 일. 그런 의미에서 모든 죽음은 나를 대신한 죽음이었노라는 감각. 수용소 바깥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프랑수아즈는 말했지만. 이곳, 우리의 현실 속에서, 모든 여자는 서로를 대신해 유린되고, 강간당하고, 살해당한다. 울고 있는 저 존재는 나의 얼굴이다. 이토록 뼈아픈 이입이 이루어지는, 현실은 연극보다 더 연극적이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유가족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 있다. 이 연극을 끝까지 올리는 일을. 이 연극을 끝까지 보는 일을.

1 Charlotte Delbo, « Qui rapportera ces paroles ? », Qui rapportera ces paroles ? et autres écrits inédits, Librairie Arthème Fayard, 2013, p. 29.
2 Charlotte Delbo, Spectres, mes compagnons, Berg International Éditeurs, 1995, p. 5.
3 Virginie Despentes, « Impossible de violer cette femme pleine de vices », King Kong Théorie, Éditions Grasset & Fasquelle, 2006, pp. 40-41.
4 Ibid., p. 50.
5 Alain Badiou, Notre mal vient de plus loin. Penser les tueries du 13 novembre, Librairie Arthème Fayard, 2016, p. 34.
6 Angélica Liddell, « La Maison de la force », La Maison de la force, Les Solitaires Intempestifs, 2012, p. 113.
7 Peggy Phelan, « Survey », in Helena Reckitt (dir.), Art and Feminism, Phaidon Press Limited, 2001, p. 44.
8 Charlotte Delbo, « Qui rapportera ces paroles ? », Qui rapportera ces paroles ? Op. Cit., p. 12.
9 Angélica Liddell, « Je ne suis pas jolie », La Maison de la force, Op. Cit., p. 15.
10 Angélica Liddell, Interview at La Bâtie Festival de Genève 2011.
11 Emmanuelle Garnier, « El año de Ricardo de Angélica Liddell : de la scène au texte, essai de ‘logocentrisme à l’envers’ », in Carole Egger, Isabelle Reck et Edgard Weber (dir.), Textes dramatiques d’Orient et d’Occident : 1968-2008, Presses Universitaires de Strasbourg, 2012, p. 205.
12 Angélica Liddell, « Maudit soit l’homme qui se confie en l’homme » : un projet d’alphabétisation, Les Solitaires Intempestifs, 2011, pp. 10-11.
13 Charlotte Delbo, « Qui rapportera ces paroles ? », Qui rapportera ces paroles ? Op. Cit.,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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