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엘 뽐므라(Joël Pommerat)의 희곡 신데렐라(Cendrillon)의 한 장면에 부쳐

때로 어떤 희곡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익명으로 존재한다. 또 때로 그 익명의 존재들은 이름을 가진 이들보다 쉬이 식별되고 기억된다. 말하자면 책장을 넘겨가며 이름을 대조하는 따분한 수고 없이도, 엄마, 아빠, 새엄마, 큰언니, 작은언니, 왕, 그리고 요정은 독자의 머릿속에 간결히 제 존재를 새긴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기 때문일까. 몽골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의 영혼을 악령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테르비쉬라는 이름을 짓는다 했다. 테르비쉬, 이름이 없다는 뜻의 이름. 악령이 나타나 아기를 앗아가려고, 이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면, 이 아이는 이름이 없어요. 조엘 뽐므라(Joël Pommerat)의 2011년작 신데렐라(Cendrillon) 에서는 심지어 신데렐라도, 다른 모든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다. 희곡의 첫장은 다만 그녀를 “아주 어린 소녀(la très jeune fille)” 라 표기한다. 아주 어린 소녀는, 신데렐라라는 이름에 더께로 앉은 가여운 편견 없이 살아남고, 살아간다. 그리고 익명의 그녀는 자유로이 부유하다 때때로 우리의 얼굴이 된다. 이때 물론 그녀가 익명이면서 동시에 여전히 찬연히도 신데렐라인 것은 주요하다. 내가 아니지만 나이고, 그러나 너일 수도 있고, 아무도 아닐 수도 있는, 단 하나의 이름이자 언제나 동시에 익명인 누군가를 응시하는 일에 어쩌면 모든 시의 근본이 놓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희곡에는 엄마, 아빠, 새엄마, 큰언니, 작은언니, 왕, 요정, 그리고 아주 어린 왕자(le très jeune prince)와 아주 어린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 더해, 목소리가 등장한다. 작품을 열며 목소리는 말한다. 자신은 너무 오래 살았고, 먼 나라들을 편력하느라 모국어조차 잊었으며, 너무 늙어버린 몸뚱이가 깃털처럼 가볍고 투명해졌노라고. 여전히 말을 할 수 있지만, 다만 몇 가지 몸짓을 통해 말할 따름이며, 지금 들려줄 이야기 속에 관계되는 인물이 자기 자신인지 다른 누군가인지를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고. 그 목소리가, 아주 어린 소녀라고밖에 호명되지 않는 한 아이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깊은 무대 먼 뒤쪽에 소녀의, 죽어가는 엄마의 침상이 놓인다. 관객에게도, 그리고 어쩌면 소녀에게도, 엄마의 모습이 그림자처럼 희미하다. 마지막 말을 겨우 속삭이는 엄마에게 소녀가 몸을 숙여 귀 기울인다. 몸을 숙여 귀 기울여도, 잘못 듣고야 마는 말들. 해맑게 소녀는 답한다. 내가 잘 알아들었다고 엄마가 안심할 수 있게 다시 말해볼게. 내 어린 딸아, 내가 이제 여기 없어도 나를 계속 생각해주렴. 네가 나를 잊지 않고 언제나 생각해준다면 어딘가에 나는 살아있는 거야. 이 말을 반복하는 소녀의 대사 앞에는 “매우 감동하여” 라는 지시문이 붙어 있다. 걱정하지마 엄마, 내가 살아있는 동안 매순간마다, 엄마를 생각할게, 그러면 엄마는 선한 새들이 지켜주는 안 보이는 은밀한 곳에 언제까지나 살아있을 거지, 라고 말하는 아주 어린 소녀는 감동에 젖어 기뻐보였다. 그 말을 듣는, 어쩌면 나도 그랬다. 그러나 소녀는 엄마의 말을 오해했고, 나도 그녀를 따라, 사랑을 오해했다. 그래서 우리는 신데렐라가 되었다.

그러나 오해라는 것은 우리의 근원적인 능력이며, 언어가 끌어안고 있는 내재적 결핍이 아니던가. 말이 갖는 그 숙명적 심연을, 가령 샤를로트 델보(Charlotte Delbo)는 일찍이 아우슈비츠에서 통감한 뒤, 목마름(Soif)이라는 단어가 그녀가 그곳에서 겪은 목마름의 실재를 결코 지시하지 못함을 토로했다. 나무껍질처럼 목이 마르고, 목마름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기도 한, 어쩌다 주어진 몇모금의 물을 개가 아니라 말처럼 마셨던 감각. 그 감각들이 어떻게 언어를 덧없이 비껴가는지를 담담히 풀어낸 그녀는 “마시다(Boire)” 라는 제목의 글을 이렇게 끝맺는다 : “목이 마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리고 그들은 까페에 들어가 맥주를 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슈비츠 이후 무정히도 천명된 시의 불가능성을 딛고, 델보는 시를 썼다. 도리어 말의 결여를 품으며, 그 결여 자체를 증언하며. 도저히 빗나갈 줄 알면서도 그 어떤 장면들을 세심하게, 구멍 뿐인 말로써 끝끝내 그려내며. 마찬가지로 뽐므라의 희곡도, 엄마의 유언을 오해함으로 촉발된 소녀의 불행을, 말의 결함과 그것이 낳는 결여를, 다정한 거리를 두고 무던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어쩌면 오히려 그 오해와 결함 때문에, 기지의 동화가 한층 유쾌하게 일그러지는 일을 즐거워하는, 시의 응시.

엄마의 죽음 이후 소녀는 서서히, 엄마를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입게 된다. 손목시계 알람을 5분에 한번씩 울리도록 맞춰두고, 알람이 울릴 때마다 소녀는 상기한다. 엄마를 기억해야해.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엄마가 진짜로 죽으니까. 그녀의 이 생각들은 종종 말이 되어 입밖으로도 나왔다. 재혼을 앞둔 아빠와 함께 새엄마의 집을 방문했을 때도 그랬다. 말끝마다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도, 우리 엄마가, 하는 소녀를 지켜보던 관객들마저 기겁을 하며 새엄마와 두 언니들에게로 슬그머니 감정이입의 대상을 돌릴 지경이었다. 뽐므라의 희곡에서 계모와 언니들은 본디 나쁜 사람들로 그려지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이 일부러 소녀에게 집안 청소를 시킨 것도 아니다. 소녀가, 다른 생각의 방해 없이 엄마를 기억하며 생활하기에 적절한 단순 노동을 스스로 기뻐 청했을 뿐이다. 해서 소녀에게 새로운 이름이 주어진다. 난로의 재받이 혹은 재털이를 뜻하는, 썽드리에(Cendrier). 말과 오해의 심연을 딛고 휘청이는 그녀가 스스로 재를 뒤집어썼다.

그러나 다정히 거리를 둔다는 것은, 스스로의 결여마저도 한발 떨어져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모종의 힘을 품고 있는 일인지. 시는 그저 펼쳐낼 뿐이지만, 그 펼침 속에서 무언가, 발생할 수 있다면 저 홀로 발생하기를, 도리어 묵묵히 기다리는 일인 것인지. 하여 오해의 종식은 다행히도, 이번에도, 신데렐라 자신으로부터 온다. 아주 어린 왕자의 생일 파티에 가게 된 소녀는 왕자를 마주치고, 열두시에 걸려올 지 모를 엄마의 전화를 받아야 한다며 뛰어 사라지는 쪽은 여기서는 왕자다. 그리고 두 사람이 두 번째로 마주쳤을 때, 이번에도 사라지려는 왕자에게 소녀가 말한다. 너네 엄마가 시골에 갔다가 교통체증에 막혀 십년째 너한테 오지 못하고, 열두시면 전화를 걸어올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니. 너네 엄마는 돌아가셨어. 이야기를 꿈처럼 더 이상 부풀리지 마. 어쩌면 나도 그러고 있었는지 몰라. 아주 어린 왕자를 깨우치며 동시에 아주 어린 소녀는 자기가 부풀렸던 이야기의 풍선을 터뜨린다. 이내 홀가분해진 왕자는 소녀의 이름을 묻고, 썽드리에보다 발음이 예쁜 썽드리옹(Cendrillon)으로 바꾸어 그녀를 불러준다. 그리고 사랑의 징표로, 신고 있던 구두 한 짝을 그녀에게 주고 떠난다 (!) 다음날 구두를 통해 소녀를 찾아낸 왕이 두 아이를 위해 다시 한번 성대한 파티를 연다. 무대에는 미러볼이 돌아간다. 왕자와 소녀는 현란한 빛 속에서 춤춘다. 파티가 끝난 뒤, 소녀는 요정에게 부탁해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고요히 되돌린다. 이 아름다운 장면을 아래에 옮긴다 :

이야기의 처음에 나왔던, 죽어가는 엄마의 방.
요정의 곁에 선 아주 어린 소녀가 엄마와 마지막으로 함께 보낸 순간의 장면을 다시 바라본다.
마치 영사된 이미지 앞에 서 있는 것 같다.

엄마 _ 사랑하는 아가… 네가 행복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면, 부디 힘을 얻기 위해서, 나를 생각하렴… 그러나 잊지 말거라, 나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미소를 띠며 그렇게 해줘.

목소리 _ 물론 이런 식으로 다시 엄마를 보는 일은 소녀를 슬프게 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엄마를 오해했었는지를 깨닫는 일도. 그러나 이날 이후로 소녀가 엄마를 생각할 때면, 소녀는 이제 오직 힘이 솟는 것만을 느꼈다.

내가 영영 사라져버리지 않도록 매순간 나를 생각해줘. 이 말이 결코 사랑일 수 없음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사랑은 이것이었다. 나를 잊고 즐거이 살다가, 네가 많이 힘들 때, 언제나 너의 힘이 되고픈 나를 생각해. 그렇지만 나를 생각할 때는 네 입술에 예쁜 미소가 걸렸으면 좋겠어. 말을 오해한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오해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오해해서, 우리는 그토록 자주 스스로 재를 뒤집어 쓴다. 실재하는 문제가 아닌, 허망한 공상에 깃댄 허다한 넘어짐들. 이 못난 마음들을 어찌할까. 그러나 한 연극이 그 마음을 있는 그대로 응시할 때, 거기 시의 아득함이 발현한다. 힐난하거나 혀를 차는 대신 파티를 벌여주는 것. 슬며시 구두 한 짝 건네며 다시 일러주는 것. 사실은 사랑이 이렇게 큰 것이란다. 이 사랑을, 이 시선을, 생각해다오. 물론 그 품 안에 한 순간 미소지을지라도, 우리는 다시 금방 재투성이 인생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매일 밤 반복되는 무대 위의 연극처럼, 다시 무너지고 또 다시 위로받는 그것을 그래도 반복하며 살아간다면, 재를 뒤집어쓴 우리는 그 모습 그대로 그 어느 시 속에 있는 것이리라, 생각해본다. 익명으로 살아남았던 우리, 스스로 못난 이름을 입고, 또 그 어느 다정한 손길에 새 이름을 얻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미소를 머금고.

일상시화 제0호, 아침달, 2016년 7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