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리엄 스튜디오, 세르쥬의 효과, 명동예술극장, 2009.11

지난 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비바리엄 스튜디오의 연극 <세르쥬의 효과>는 사실상 매우 교묘한 메타 연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숫기 없고 독특한 성격의 세르쥬에게 빠져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연신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지만, 그처럼 가볍게 보이던 연극의 곳곳에는 기실 갖가지 서사극적인 장치들이 간과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닌 채 은밀하게 포진되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것들이, 이 극에서 ‘효과’라는 것을 낳았다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세르쥬의 효과>는 그 제목에서부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무엇이 ‘효과’란 말인가? ‘효과’라는 단어는 가장 먼저는 ‘나비효과’와 같은 거창한 무언가를 연상시킨다. 그 이론에 따르면 조그마한 나비의 날갯짓 하나로 인해 지구 반대편에서는 거대한 폭풍이 불어 닥칠 수도 있다. 그런즉 그 짧은 용어 속에는, 그 효과는 창대하지만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시작은 미미하다는 역설, 혹은 인간의 생각이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예측 불가능한 것들의 무한한 발생 가능성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함의들은 이 극이 드러내고자 하는 것들과 일면 맞닿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의미를 지닌 저 ‘효과’라는 것은 극 중에서 실제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세르쥬는 일요일마다 베푸는 자신의 공연들에 ‘효과’라는 말을 붙이곤 했다. ‘헨델 음악에 맞춘 회전 효과’, ‘바그너 음악에 맞춘 빛의 효과’ 등등. 나아가 그때그때마다의 음악에 맞춘 무언가의 효과들은 전체 연극을 통과해서 단 하나의 효과로, 즉 ‘세르쥬의 효과’로 수렴된다. 그렇다면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일으킬 수 있는 데 반하여, 과연 세르쥬의 그 무엇이 어떤 것을 불러일으키기에, 이 연극은 그것을 그의 ‘효과’라 명명하는가?

앞서 이 극은 메타 연극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메타 연극이란 관객으로 하여금 연극을 세계의 단순한 모사나 재현으로 여겨 거기 빠져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연극 자체로서 거리를 두고 성찰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연극을 실제 세계의 한 단편으로 취급하여 극화의 과정이나 연기 메커니즘 등을 폭로하고, 그리하여 결국 인생이 곧 연극이요 세계가 곧 무대라는 진리를 관객에게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극중 인물이면서 동시에 배우로서 다가오는 무대 위의 연기자들을 보면서, 우리 역시 인생이라는 무대의 한 배우임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바로 셰익스피어 시대에 유행하였던 ‘Theatrum Mundi’ 사상의 골조이다. 그리고 매우 교묘한 메타 연극으로서의 이 극 <세르쥬의 효과>도 또한 이러한 사상에 얼마간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세르쥬가 폭로하는 진실이 우리의 인생에 맞닿아 있음을 보게 된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미세한 세르쥬의 움직임과 표정, 그의 굽은 어깨와 수줍은 눈길 등이 우리에게 폭풍처럼 거대한 효과를 일으키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무대 위의 한낱 배우 같은, 그런즉 세르쥬 같은 우리 자신을, 그리고 연극 같은 이 인생을 똑바로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극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객석을 밝히던 조명이 꺼지면, 극장은 어둠뿐이고, 무대를 꽉 채우고 있는 세르쥬의 길고 좁은 방 너머, 왼쪽의 커다란 유리 미닫이문 뒤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정원이 보인다. 그곳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가지런히 서 있는데, 이파리들은 아래에서 비치는 엷은 조명을 받아 마치 꿈결 같다. 곧 자욱하게 안개가 깔리고, 오른편으로부터 우주복을 입은 키 크고 깡마른 한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온다. 그의 목소리는 얼굴을 덮은 크고 둥근 헬멧 안에 갇혀 웅웅거리게 들린다. 그 첫 대사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 공연은 지난번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그는 비바리엄 스튜디오의 이전 작품의 끝에서 우주인의 역할을 했고, 그래서 이번 작품의 처음을 우주인으로서 연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오늘 저는 <세르쥬의 효과>에 출연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바로 이 연극의 서사극적 특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우주복을 입고 있는 그는 아직은 ‘세르쥬’가 아니다. 그는 전에는 우주인을, 오늘은 세르쥬를 연기하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등장하여, 이 밤의 공연으로부터 분리된 채, 그것을 관객에게 소개해주고 있다. 연극이 연극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배우가 인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는 이와 같은 장치로 인해, 관객은 자신들과 동일하게 현실 세계에 속한 자로서의 그 배우에게 모종의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이후 그가―여전히 세르쥬가 아닌 채로―세르쥬의 방을 소개할 때에, 관객은 그 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그를 관찰함과 동시에, 그와 동일한 위치에서 그와 함께, 저 세르쥬의 공간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즉 먼저 공간에 대해 살펴보자. 몽환적인 정원과는 대조적으로, 세르쥬의 방 안은 어둠 속에서도 매우 차갑고 현실적인 느낌을 준다. 우주복을 입은 배우는 랜턴을 들고 탐험하듯 그 방 곳곳을 하나의 ‘연극적’ 공간으로서 묘사하지만, 그 자신의 현실적임 때문인지, 그가 서 있는 세르쥬의 공간은 관객에게 매우 ‘실제적인 하나의 세계’로서 다가온다. 도리어 연극적인 곳은 저 너머의 정원이며, 연극이 시작되기 이전의 객석이었다. 사실 관객들이 입장할 때 객석을 비추던 조명은 일반적인 경우에서라면 객석이 아니라 무대를 비추는 데 쓰일 법한 종류의 조명이었다. 그 빛으로 인해, 캄캄한 무대 위 세르쥬의 유리문에는 거울처럼 관객들이 비쳐 보였다. 연극적 공간에 머물고 있는 자는 도리어 객석에 앉은 우리들이었던 것이다. 더욱이 여러 설명을 끝내고 비로소 세르쥬가 되면서 배우는 그 방에 드디어 불을 켜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무대를 위한 특수 조명이 아니라 단순한 형광등에 불과한 것이었다. 세르쥬의 방은 참으로 하나의 현실의 장소였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책상 대용으로 설치해 둔 (임의적이고 이중적인 기구인) 탁구대가 오른편을 차지하고, 갖가지 자질구레한 것들, 장난감들, 책들, 종이봉투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TV와 오디오가 한 구석에 있을 뿐 딱히 가구라 칭할만한 것들이 없어 집이라기에는 조금 삭막해 보이기도 한다. 우주복을 입은 남자가 설명하기로는, 세르쥬는 (침대 대신) 푸른 카펫 위에 길게 누워 있을 수 있고, 또 원한다면 카펫 아래에 누울 수도 있다. 그는 음악을 들을 수도 있고, 음악을 바꿀 수도 있다. 그 곳이 바로 세르쥬의 공간이며, 관객들은 자연주의 연극 시대에 제4의 벽을 통해 무대를 바라보던 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실제적인 하나의 공간을 염탐한다. (심지어 이후 실제 차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 곳은 세르쥬의 방인 동시에 가까운 친구의 방인 듯, 심지어 우리 자신의 방인 듯, 현실적으로 관조되고 있다.

이렇듯 첫 장면에서부터, 그러니까 본격적인 연극을 진행하기 전부터―물론 엄밀히 말하면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연극은 이미 시작되었다―메타 연극의 여러 요소들은 현실과 허구 사이에서 뒤섞이면서 묘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이중성은 비단 공간적인 측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금 배우에게 초점을 맞춰보자. 전 공연을 통틀어, 과연 그는 어떤 순간부터 어떤 순간까지 ‘세르쥬’인 것인가? 처음 등장할 때 그는 지난 연극의 말미에서 우주인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의 배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때조차도 그는 단순히 한 명의 실제 배우인 것은 아니다. 그는 어쩌면 한 사람의 ‘배우’라는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실제와 연극의 경계는 이렇게 흐트러진다. (이는 극단의 다음 연극을 소개하며 극을 끝마치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후 그는 앞으로 펼쳐질 연극에서의 중요한 장치인 ‘보이스 오버’에 대해 설명하는데, 이 작업이란 것이 또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에 따르면 이 극에서 그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도 관객에게 말을 전달할 수가 있다. 곧이어 그 보이스 오버를 통해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그는 자신의 문장들의 주어를 ‘나’에서 ‘그’로 교묘히 바꾼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따르면 ‘그’는 그 무대 위에서 이것저것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매주 일요일 저녁 거기서 짧은 공연을 올린다. 목소리가 말한다. “자, 이제 시작합니다. 때는 11월, 정오입니다. 아니 그보단 초저녁이군요.” 배우는 우주복과 헬멧을 드디어 벗어버린다. 방에는 불이 켜진다. 그리고 이제부터 그는 세르쥬이다.

그런데 이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요컨대 인물은 단지 온오프 식으로 현실과 연극을 오가는 것이 아니다. 앞서 보이스 오버 작업을 소개하면서 그는 그것이 목소리에 관할 뿐 아니라 시간을 다루는 작업이기도 함을 설명했었다. 그런즉 시간의 경과를 나타내기 위해, 이 극에서는 그 장치가 활용된다. 극중 세르쥬는 몇 차례의 일요일에 걸쳐 친구들을 초청하고 짧은 공연들을 보여주는데, 그로 인해 이 극은 한 일요일에서 다른 일요일로 넘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그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내 주어야 했다. 그리고 여기서 간단히 보이스 오버의 작업이 삽입된다. 세르쥬는 바로 앞의 장면으로부터 몇 주 후의 일요일로 가기 위해서 입조차 뻥긋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저 계속해서 피자를 먹거나 TV를 보고 있으면 된다. 그리고 관객들은 어디선가―아마도 그의 내면으로부터일 것이라 상정되지만―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령 목소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서 또 다른 일요일이 되었습니다.” 다음 장면에서는 또 이런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흐릅니다. 그래요, 세르쥬는 옷을 갈아입으며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네요.” 이 장치는 여러 모로 관객에게 웃음을 유발하는데, 우선 관객들은 구렁이 담 넘어가듯 시간을 넘어가는 이 극의 그와 같은 능청스러움 때문에 웃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세르쥬의 저 천연덕스러움에 웃으며, 시간이 흘러 다음 일요일이 될 때까지 그가 정말로 그처럼 단순한 몇 가지 행위에만 몰두하면서 무료히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을 것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에 또 웃음을 터뜨린다. 사실상 장면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심지어 이전에 놀러왔던 친구가 먹고 간 음료수 잔들이―마치 하나의 역사처럼―치워지지 않은 채 여기저기 놓여있기도 하다. 다만 세르쥬가 옷을 한 겹씩 벗어 시간의 경과를 시각적으로 나타내긴 하는데, 그 소심하고도 당당한 몸짓에 관객은 여지없이 또 웃음을 터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시간의 경과를 보여주는 장면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이끌어진다. 그 순간 무대 위의 저 인물은 다만 ‘세르쥬’로서 거기 있는가? 보이스 오버를 통해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렇다면 누구의 것인가? 세르쥬의 것인가 아니면 이전에 연극을 시작하며 등장했던 그 배우―지금은 세르쥬를 연기하고 있지만 사실은 세르쥬가 아닌―의 것인가? 이러한 의문들은 이 극에서 끊임없이 표출되고 있는 저 모호성으로부터 유발된다. 사실 맨 처음 세르쥬의 방을 소개하던 배우의 목소리와, 극중 세르쥬의 목소리와, 보이스 오버 되어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목소리는 모두 동일한 것이었다. 어딘지 성의 없고 무심한 듯하면서도 한없이 예의바른 저 말투는 ‘세르쥬’라는 한 가지 심상으로 수렴되고 있다. 그리고 그럼에도 때에 따라 그것은 나뉘어서, 현실이나 연극 속의, 앞서 구분한 서로 다른 인물들에게 귀속되기도 한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실제적인 현상으로서 받아들이며, ‘연극’이나 ‘인물’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거리를 취하고, 그것들의 모호성을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면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바로, ‘인생’이나 현실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저 근원적인 모호성이다.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 또 어느 시점까지, 우리는 과연 누구로서 존재하는가? 연극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무대 위에 있고, 무대 위에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몇 개의 자전적인 시선들을 갖고 있으며, 모두들 입을 꾹 다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우리 자신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고 있음을.

이처럼 현실과 연극을 오가며 관객들을 또 이곳저곳으로 이끌어가는 배우의 역할은, 이 극에서 또한 ‘연기’의 측면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극이 끝난 후에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세르쥬를 연기한 배우는 실제로 배우가 맞는지 하는 질문을 받기까지 했는데, 그만큼 그의 연기가 대단했음을 우리는 그 질문 자체를 통해 추론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참으로 ‘세르쥬’ 같았고, 그러니까 잘 연기된 ‘세르쥬’라는 배역 같았다기보다, 그저 현실 속에 존재하는 한 명의 ‘세르쥬’라는 사람 같았다. 소심하고 내성적이고 혼자 있기를 즐겨하는 세르쥬. 탁구를 치기도 하고 장난감을 조종하며 놀기도 하고 또 레이저 안경을 조립하기도 하는 세르쥬. 홀로 있는 시간만큼이나 친구들을 초청하여 공연을 베푸는 그 짧은 순간을 내심 무척 좋아하는 세르쥬. 그래서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 공연들을 준비하기 위해 나름대로 언제나 굉장한 성실을 다하는 세르쥬. 배우는 그와 같은 면모들을 그 어떤 과장도 왜곡도 없이, 완벽하게 실제처럼 연기해낸다. 그의 어눌한 말투는 일상적이고 소시민적인 어떤 한 사람의 실제 말투 그 자체였고, 구부정한 어깨와 어슬렁거리는 발걸음들, 힘이 빠진 몸짓과 시선 등은 오랜 세월 그의 몸에 배어 체화된 습성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관객들은 무대 위의 그 인물을―앞서 다루었던, 극중 인물과 실제 배우 등의 여러 층위를 넘나드는 극적인 모호성 속에서조차―현실적인 한 사람으로, 그런즉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동류의 한 인간으로 대하게 된다. 그는 거리낌 없이 바라봐지고 평가된다. 나아가 그를 향해 끊임없이 터지던 웃음들은 연극의 어떠함을 향한 것이라기보다 한 명의 실제 인물인 그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 배우의 연기는 뛰어났으며, 그 연기의 그러한 현실적임은 곧 객석에 자리한 우리들의 현실과 우리들의 실제 모습들에 대한 성찰로 되돌려지곤 했다.

세르쥬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가 얼마나 뛰어났던가 하는 것은 그의 친구로 등장했던 아마추어 배우들의 의식적인 연극적 어투들이 특별히 어색하게 포착되었던 몇몇 순간들에 보다 잘 드러났던 것 같다. 사실 이 극에서는 세르쥬 외에 일곱 명의 인물이 더 등장하는데, 그 중 네 사람은 한국에서 인터넷 응모를 통해 선발된 아마추어 배우들이었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극단에서 일하는 프랑스인 직원이나 배우들이었다고 한다. 한국인 아마추어 배우들은 세 번의 일요일에 걸친 세르쥬의 공연에 혼자 혹은 둘이서 관객으로 초청되었다. 여기서 잠깐 먼저 이 극에서 반복되는 어떤 구조에 대해 살펴보자. 세르쥬는 한국인 친구들이 올 때마다 몇 개의 짧은 한국어 문장을 되풀이한다. “코트 이리 줘.” “뭐 좀 마실래? 물, 오렌지 주스, 와인, 어떤 것?” 그리고 음료를 갖다 준 후엔 의자나 방석을 내어주며 “여기 앉아.”라고 말하고, 곧 그 날의 공연에 대해 가령 다음과 같이 짧게 영어로 소개하는 것이다. “오늘은 존 케이지 음악에 맞춘 레이저 효과입니다.” 설명만큼이나 짤막한 그 날의 공연이 끝나면, 그는 조용히 상대의 반응을 기다린다. 아주 들떠 있다거나 엄청난 호응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는 무심한 척 하면서도 매우 수줍게, 기다린다. 그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라도, 그들이 무언가 말해주기를. 그리고 그들의 짧은 평이 끝나면, 그는 모든 할 일을 끝마친 듯한 뿌듯함과 더 오래 함께 있기엔 어색한 듯한 어떤 껄끄러움을 동반한 채로, 한국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배웅해줄게.” 그러면 다음 언젠가의 일요일에 올 것을 기약하며 친구들은 떠나간다. 이것이 세르쥬의 일요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인 친구들의 대사는 이러한 틀에 맞추어 짤막하게 단지 몇 차례만 삽입된다. 그들은 세르쥬에게 인사를 하고, 음료수를 고르고, 의자를 내어주면 고맙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그 날의 공연에 대한 몇 마디 평을 한다. 대개 처음은 어색한 침묵 끝에 “좋았어.”라는 한 마디로 시작되고, 이어 그들은 “빛의 움직임과 음악의 리듬이 조화를 이루었어.” 등의 말을 덧붙인다. 그런데 이때 그들의 말투는 세르쥬의 일상적 말투에 비해 사뭇 연극적이었다. “좋았어.”라는 단순한 한 마디를 발음할 때조차 그 아마추어 배우들은, 무대 위에 올라왔다는 특별한 사실에 긴장하여 경직된 탓인지, 일상에서와는 조금 다른 어색한 발성과 억양을 사용하곤 했다. 헌데 그들의 그러한 어색함은 연기라는 것을 도리어 메타적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고, 무대 위의 모든 것들을―세르쥬의 현실적인 연기와는 다른 방식으로―하나의 실제로서 받아들이도록 해 주었다. 이와 유사한 공로를 우리는 또 그들의 즉흥적인 대사들에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세르쥬의 짧은 공연을 본 뒤 각자가 보일 반응에 대해 연출가 측에서 그들에게 요구한 것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단지 그들은 ‘세르쥬처럼’ 숫기 없고 말을 느리게 할 것, 그리고 이미 세르쥬의 그와 같은 공연들에 익숙한 사람처럼 행동할 것을 요구받았을 뿐, 그때그때의 대사들은 스스로 즉흥적으로 만들어내야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계속해서 주목되고 있는 이 극의 특성에 잘 부합한다. 아마추어 배우들이 자발적으로 매순간 자신의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개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극에서 표방되는 허구와 실제 사이의 모호성을 이끌어내는 데 또한 기여한다. 나아가 공연을 할 때마다 각 나라 각 지역의 아마추어 배우들을 세르쥬의 친구로 초청하는 이 극단의 전략은, 그들로 인해 무대에 부여되는 지역적인 특색이 그 지역의 관객들에게 또 하나의 생생한 현실감을 제공하게끔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 극에서의 공간의 사용, 배우와 극중 인물 사이의 모호성, 연기, 한국인 아마추어 배우의 등장 등은 연극을 실제 세계의 한 단편으로서 바라보고 우리의 인생이 곧 연극임을 깨닫도록 관객들을 이끌어가기 위한 각종 서사극적인 장치들이었다. 그런데 ‘그로 인해 궁극적으로 바라봐지는 우리들의 연극 같은 인생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시금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물음은 ‘세르쥬의 효과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우리의 근원적인 화두와 맞닿아있다. 앞서 우리는 아마추어 배우들의 공연평이 즉흥적인 것이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헌데 그로 인해 실제로 세르쥬는 한국어로 이루어진 그들의 평을 매번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물론 한국인 친구들은 서툰 몇 마디 영어로 그들의 느낀 바를 세르쥬에게 전하려 애쓰곤 했다. 가령 ‘헨델 음악에 맞춘 회전 효과’를 본 친구는 “바다 위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는 배 같았어.”라고 말을 한 뒤에, “Dancing ship… on the ocean…”하고 손짓을 가하며 웅얼거린다. 세르쥬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몇 주 뒤 일요일에 다른 공연이 있을 것임을 알린 후에, 이내 “배웅해줄게”라고 하며 그녀의 코트를 가지러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면들 가운데서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소통의 단절들’이었다.

세르쥬는 공연이라는 아주 특별한 형식으로 친구들과의 소통을 도모한다. 그는 매우 진지하고 성실하게 거창한 음악들과 장난 같은 조악한 장치들을 연결 짓는다. 이처럼 그가 공연이라는 형식을 택했던 것은 아마도 그 일요일의 공연을 덮고 있는 더 큰 (<세르쥬의 효과>라는) 공연을 현실로서 보게 하거나 반대로 그 작은 공연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보게 하려는 서사극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겠지만, 단순히 보면 세르쥬는 다만 공연이라는 형식을 통해 관객으로 찾아온 자신의 친구들과 보다 극적이고 관대한 어떤 소통을 꾀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소통의 시도들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연극이 엄청난 웃음을 유발함과 동시에 어떤 멜랑꼴리한 정조를 근원적으로 풍기게 되는 이유이다. 세르쥬가 내민 손길은 그의 친구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돌아오는 것은 “좋았어.”라는 어색한 한 마디뿐, 그들은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한편 마지막 네 번째 일요일에 그는 한국인 친구들 모두와 다른 프랑스인 친구들을 초대하여 ‘빅 체스넛 음악에 맞춘 폭죽 효과’를 공연하는데, 공연이 끝나고 잠깐의 담소 뒤에 친구들이 하나 둘 떠나가자, 마지막에 한 명의 한국인 여자 친구와 세르쥬만이 남는 장면이 있었다. 그때 그 친구는 꼭 무언가 세르쥬에게 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헌데 잠시 그렇게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침묵을 견디지 못한 세르쥬가 먼저 말을 꺼낸다. “배웅해줄게.” 그리고 이로써, 세르쥬 역시 그녀가 내민 손을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은 감히 서로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저마다의 세계에 갇힌 채 서로에게 수신호를 보내지만 그에 대해 겨우 “좋았어.” “고마워.” 류의 말들을 나눌 뿐인,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닮았다.

헌데 여기서 아이러니한 것이 있다. 예술가와의 대화 시간에 연출가 필립 켄이 말하기를, 어떤 나라 혹은 어떤 공연에서는 관객들이 전혀 웃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아마도 그 경우의 관객들은 세르쥬의 멜랑꼴리한 측면에 더 많이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적어도 필자가 관극했던 날의 공연에서는 끊임없는 폭소가 객석을 가득 메웠었다. 무대 위의 명백한 외로움들을 목도하면서, 그러한 우리의 인생을 관망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참 많이도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세르쥬는 극중 관객인 그의 친구들과는 소통에 실패했을지 모르나, 적어도 우리에게는 그의 시도가 성공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는 바로, 우리가 세르쥬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소통되지 못하는 몰이해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도록, 메타 연극의 주인공 세르쥬는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갔고, 마침내 그 자신과 우리를 동일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모순적이겠지만 거리두기와 동일시는 이렇게 만난다) 사실상 이 연극은 매우 엄청난 담론들을 숨기고 있었음에도, 기존의 연극 관행이라든지 현대 사회의 제반 모습이라든지를 맹렬히 비판하거나 무언가 다른 대안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연극은 소외라는 것, 몰이해라는 것을 나쁘게 바라보지 않는다. 다만 세상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드러냈을 뿐, 그리고 우리 역시 그저 함께 웃을 뿐이었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 연출가는 “누군가 무대 위로 올라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그런 일이 없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그러나 악당이 쳐놓은 덫에 걸려 위험에 처한 주인공을 지켜주려고, 혹은 그 악당을 때려주려고 무대 위로 돌진해가는 어린 아이와 우리는 물론 같지 않다. 메타 연극의 여러 장치들을 통해 삶과 연극이 그 아무리 동일시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정도까지 연극을 실제로 착각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필립 켄이 이야기한 바도 그러한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리고 그가 바란 바와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은 대신에, 다만 우리는 마음만으로는 열렬하게 세르쥬 자신이 되었고, 세르쥬의 친구가 되었으며, 혹은 그들과 같은 현실 속에서 우리들 개개인의 모습으로, 그렇게 이미 같은 무대 위에 서 있었다. 그리하여 여전히 소통은 부재하고 초청받아 찾아간 장소에는 장난 같은 시시함이 난무할 뿐이지만, 영락없는 세상의 그와 같은 모습에 대해 우리는 함께 웃음을 짓는다. 인생의 초라함을 직시하는 일은 반드시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 연극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것은 때로는 배꼽이 빠지게 웃을 만큼 유쾌하며, 소통의 부재 속에서 도리어 참된 소통이 싹트는 것임을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연극 같은 삶, 인생 같은 연극에 우리를 동참시켜준 이 극은 그러므로 참으로 초라한 동시에 눈물겹게 위대하다. 이토록 비천한 우리네 인생들을 어느 일요일 저녁마다 기꺼이 초대하여 코트를 받아주고, 마실 것을 고르게 해 주고, 자리를 내어주고, 공연을 보여주고, 또 배웅까지 해주는 세르쥬. 그가 일구어낸 인생의 효과는 진실로 나비처럼 작고, 또 폭풍처럼 거대한 것이었다.

연극평론 2010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