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세 작가의 “올모스트” 시리즈에 대한 고찰

통상적으로 미술이나 연극에 있어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라는 수식어는 그 설치나 공연이 특수한 한 지점으로서의 장소를 점유할 때 따라붙는다. 가령 나치시대 대학살이 일어난 어느 병동이라든지 이제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구-서울역사와 같은 장소에서, 오직 그곳에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공연들이 만들어지고 무대화되며, 초청된 관객 모두 그 공간 안에서 함께 거기 배태된 역사적 더께를 체험하는 일이 이루어진다. 이 경우 장소는 과거에 속하며, 말하자면 ‘유령들이 출몰하는 곳’으로서 사유된다. 그런 의미에서 정진세 작가의 “올모스트” 시리즈는 통상적인 차원의 장소특정성을 다소간 비껴간다. 그에게는 죽은 이들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중요하며, 이때 장소라는 범주 역시 특정 지점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터전인 광활한 지역 전체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존 카리아니(John Cariani) 원작 “올모스트, 메인(Almost, Maine)”에 대한 창조적 변주로서의 “올모스트” 시리즈는 그리하여 문자 그대로 “올모스트”인, 뚜렷한 경계 없이 삶의 변두리를 품은 새로운 의미의 장소특정성을 제시한다.

매 작품은 여덟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지며, 각 에피소드는 해당 지역의 어느 우연한 풍경들을 담는다. 예술대학 연기과 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여학생과 그 대학 진학을 꿈꾸며 만화를 그리는 남학생이 동네 벤치에서 만나 지상 최후의 동물들(체홉의 갈매기)과 만화 캐릭터들(포켓몬스터)의 이름을 번갈아 호명하는가 하면, 함께 곡을 작업 중인 두 남녀가 지리한 새벽을 지나 바다로 가는 대신 중랑천에 차를 세우고 마음을 나눔으로써 음악을 완성한다(올모스트, 석관). 홍대 앞 토박이 출신 남자가 그곳을 폭파시키고 싶어 하는 인디밴드 기타리스트를 당인리 발전소 앞에서 말릴 때, 서교동의 한 야외 카페에서 어느 청춘남녀가 수줍게 사랑을 확인할 때, 그 일대에는 일순 마른 천둥 같은 폭발음이 울리고, 세월이 지나 또 다른 젊은 예술가들이 폐허가 된 홍대 앞을 다시 축제의 장으로 꾸미며, 거리의 화가는 사라져간 사람들의 얼굴을 썩지 않는 비닐 위에 그린다(올모스트, 상수).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두 남녀는 과천의 미래와 자신들의 과거를 이야기하고, 코오롱 건물 앞에 모인 시위대는 저마다의 요구사항을 외치다 흥겨운 합창을 하며, 어느 가까운 미래에 과천여고 방송실에서는 방사능 유출을 알리며 신속한 대피를 권고하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올모스트, 문원). 이른 새벽 인천역 대합실에서 마주친 전도사와 예술가가 각자의 사기를 논하고, 인천 상륙작전 직전의 북한군 본부에서는 때 아닌 수영 강습이 이루어지며,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이제 곧 허물어질 낡은 다방에서 근대 신여성 차림의 모델이 온라인 쇼핑몰 사진 촬영을 한다(올모스트, 문학). 이 같은 풍경들은 모두 작가의 일차적인 지역 리서치로부터 구상되며, 공연을 함께 만드는 지역 출신 일반인 배우들과의 이차적인 수다가 여기 색과 맛을 더한다. 그리고 그들이 마침내 어색하지만 진실된 연기로 공연에 임할 때, 함께한 지역 관객의 유쾌한 호응과 더불어 매회 공연은 다시 한 번 그 지역의 새로운 장소성 속으로 편입된다.

미셸 드 세르토(Michel de Certeau)는 “일상의 풍경들(The practice of everyday life)”이라는 저서에서 ‘strategy’와 ‘tactics’의 두 개념을 구분했다. ‘전략’이라는 말로 동일하게 번역되는 두 용어를 그는 각각 ‘도시의 전략’과 ‘일상의 전략’으로 풀이한다. 전자는 마치 지도처럼 위에서 내려다본 듯 뚜렷하게 구획 지어지는, 그리하여 구석구석 권력이 미칠 수 있는 도시를 가리키며, 후자는 우리가 이미 속해 있는 까닭에 결코 위로부터의 시선으로 조망할 수 없는, 다스려질 수 없는 일상의 불투명성을 암시한다. 드 세르토는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장소(place)와 공간(space) 개념도 구분하는데, 그에 따르면 장소란 대립되는 것들이 결코 공존할 수 없고, 수동적인 관객들에게 단일한 의미가 주입되는 곳인 반면, 공간에서는 도리어 대립들로 인해 가치가 발생하고, 역사적 주체로서의 관객들이 행위를 통해 그에 참여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장소 속에 살고 있지만, 그것을 매순간 공간으로서 살아내야 한다고 드 세르토는 말한다. “올모스트” 시리즈에서의 장소특정성은 그러므로 평면성 속에 가둬지지 않고 권력에 의해 그 가치가 절멸되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주체적인 삶 가운데 의미들이 발생하고 뒤섞이는, 그러한 ‘공간의 특이성’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곳은 카리아니 원작의 ‘메인’ 지역처럼 장소 자체의 획일적인 낭만성을 담지할 필요가 없다. 석관에는, 상수에는, 문원에는, 날마다 오로라가 뜨지 않는다. 정진세 작가는 오히려 그 자체로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쇠락해가는 장소에 끼어들 수 있는 의외의 순간들을, 낭만 자체가 아닌 낭만의 가능성들을 주목하고, 그로써 작품의 외연에 무한한 깊이를 부여한다. 말하자면 억지 낭만으로 현실을 포장하지 않되 다만 일상의 풍경들 속에 픽션이 끼어들도록 하는 것, 그리하여 밤하늘에 오로라가 빛나는 대신 우레 소리와 함께 발전소가 폭파하는 것, 그 전략이 그의 글쓰기를 아름답게 한다.

영국의 극작가 에드워드 본드(Edward Bond)에 의하면 우리 사회는 지극히 자동화되어 있고, 삶을 채우는 것은 언제나 예상 가능한 반응들뿐이다. 그러나 예술이란 거기 균열을 내는 것. 가령 누군가 전화해서 “너희 집이 불타고 있어!” 라고 말할 때 상대가 “정말 잘 됐다!” 라고 대답하는 일이 예술에서라면 가능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 같은 반응이 현실에서 불가능한 이유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 사이, 저 두 개의 말 사이가 너무도 어마어마한 간극으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인데, 바로 그 간극 속에 픽션들이 끼어들도록 하는 데 예술의 본령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란 끊임없이 새로운 전화 응답을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그는 쓴다. 그런데 “올모스트” 시리즈의 거의 매 장면에는 그 같은 픽션들의 난입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예기치 못한 뒤틀기로 인해 자동화된 사회에 균열이 가고, 획일화된 장소에 틈이 생긴다. 능청스럽게 기대를 비틀고 허허실실 말장난을 일삼는 정진세 작가 특유의 글쓰기는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예술의 최전선에서 사회와 맞선다. 에드워드 본드는 묻는다. “한 대형 여객선이 바다를 지나고, 겨우 두어 사람 탔을 뿐인 작은 뗏목도 거기 지나간다. 이때, 누가 누구를 구할 것인가?” 굳이 구원이나 치유를 목적 삼지 않았음에도, 공간과 사람을 보듬는 정진세 작가의 글에서는 치유가 일어난다. 그 눈치 없고 소소한, 터무니없는 픽션들 속에서. 짤막하게 오가는 문장들과, 사이사이 어색한 침묵들 속에서.

전학 온 친구와 한참을 실랑이하다 겨우 친구가 되어줄 듯 마음을 열던 아이는 실은 그 친구 때문에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야 하는 아이였다(올모스트, 문원).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 없이 클럽을 전전하는 프린지 자원 활동가가 똑 부러지는 나이 어린 프린지 스태프로부터 한참 핀잔을 듣다가, 돌연 그녀의 고민 상담가로 변해 함께 클럽 행을 외친다. 그런가 하면 클럽 빵 근처 고시원에 사는 남자가 클럽 변소에서 배변을 위한 사투를 벌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기타 소리에 개운하게 볼일을 마치기도 한다(올모스트, 상수). 공공장소에 대한 누군가의 정의처럼, “무언가 우연을 통해 어떤 일들이 거기서 발생하고, 몇몇 사건은 부조리하며, 몇몇은 희극적이다.” 희극적인 것, 그것에 대해 정진세 작가는 시리즈의 매 작품 첫머리에 이렇게 기록한다. “슬픔을 달래는 낭만이야말로 연극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름 아닌 “올모스트” 시리즈의 출발점이었다. ‘메인’처럼 원래부터 아름다운 곳이 아닌 다른 초라한 지역들에도 낭만이 깃들 수 있음을 그 지역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 프로젝트는 애초에 시작되었다. 혹자는 이를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로 분류할지 모른다. 그러나 파올로 프라이어(Paulo Freire)가 “억압된 자들을 위한 교육(Pedagogy of the oppressed)”에서 따끔하게 지적하듯, “일반인과의 공동 작업이 그 자체로 선한 것은 아니며”, 그것은 결코 ‘문화적 침입’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정진세 작가에게 희극적인 신파로서의 낭만이 주요했다고 할 때, 다행인 것은 그 낭만이 희곡 작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일반인 배우들 및 지역의 관객들을 언제나 향하고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는 매 작품의 첫머리에 아래와 같이 명시한다:

공연하는 사람들은 석관동 거주민들의 콤플렉스를 잊지 말아야 한다.
홍대 앞에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과, 예술을 실천하는 예술가들의 고민을 생각해야 한다.
과천의 동네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이 동네를 떠난 사람들의 고민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아픔을 존중하고, 고통을(대부분 감추고 있겠지만) 연기해야 한다.” 나아가 “스스로 악역을 맡음으로써 상대적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역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자괴감과 저열함으로 괜스레 장소를 탓하거나 비웃는 우리의 못난 이면일 것이다. 인물들은 말한다. “내가 아는 언니가 있는데 여기서 청춘을 다 보냈어. 나도 그렇게 될까봐…”(석관) “여긴 예술 못해도 예술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아.”(상수) “너, 과천청사 지하에 뭐 있는 줄 알아? 거기에 핵폭탄 있어.”(문원) 그렇다면 이 같은 문장들로 인해 부각되는 상대적 가치는 또 무엇일까. 단언컨대 그것은 석관동에서 그럼에도 여전히 빛나고 있는 오늘의 청춘이며, 프린지에 대한 비꼼 너머에 비치는 진한 고마움이며, 핵폭탄이 터져도 지켜질 무언가에 대한 희망이자 약속이다. 흥미롭게도 정진세 작가는 작업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참여자들과의 대화가 직접적으로 작품에 반영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따금 누군가 회한의 말을 했을 때는 꼭 그것을 끌어와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회한을 내비친다는 것은 어떤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의 반증이고, 나아가 그 가치가 공유될 때 참여자나 작가 자신에게 일종의 치유가 일어났다고도. 후회 속에서 위로가 싹트는 이 기묘한 수다 공동체에는 그리하여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가 없다. 커뮤니티 아트는 결코 일방적인 계몽으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모두 함께 회한에 젖고, 모두 함께 다시금 낭만을 꿈꾼다. 바로 그때 공동체가 속한 세계는 침체가 아닌 변화를, 그리고 미래를 향하게 된다.

헌데 지속적으로 함께 나눌 낭만과 꿈만을 암시하기에는 시대의 절망이 너무도 암흑이었던 것일까. 특별히 이번 작품 “올모스트, 문학”에서는 이에 관한 자조와 반성, 향수와 우울의 인상이 짙게 드리워진다. 가령 ‘자괴감과 저열함으로 상대를 높이는’ 사례로 꼽을 만한 “탁구 결승전” 에피소드만 보아도 그렇다. 때는 2014년 4월 18일, 인천 문일여고 체육관에서, 안산 단원고 탁구팀과 인천 문일여고 탁구팀의 결승전이 벌어진다. 계속해서 세트를 내주고 있는 선수들을 독려하며 문일여고 팀의 코치가 외친다. “탁구는 멘탈게임이야. 이런 말해서 좀 그렇지만 쟤네 지금 흔들리고 있어. 이번에 메달 따고 대학 가야지. 쟤네는 친구가 걸렸지만, 너네는 인생이 걸렸어.” 그러나 결국 멘탈이 도무지 약했던, 혹은 지나치게 강했던 어린 선수들은 어느 팀 할 거 없이 눈물을 쏟고 만다. 희곡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어쩌면 무대 위에서도 보이지 않을?) 소녀들의 앙다문 입이, 물에 빠진 친구들이, 그들을 짊어지고 갈 저 여린 인생들이, 코치의 퍽퍽한 외침 너머로 절절하게 감각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드높여진 그 가치가 결코 행복하지 않다. 희망적이지 않다. “올모스트, 문학”에 이르러 정진세 작가는 그간 참여자와 지역 관객을 향해 팔을 벌려 보듬던 특유의 ‘커뮤니티 아트’적 색채를 스스로 자조한다. 가령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아트플랫폼 면접을 망친 한 예술가는 “우리는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없다. 커뮤니티 아트는 다 사기다.” 라며 난동을 피우고,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친구의 연애편지를 돈 받고 써주는 대필작가는 문학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고 고개를 젓는다. 그렇다면 예술의 힘은 사라졌는가. 정진세 작가는 그들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내가 변하려고 하는 것이다. 상대가 아니라 내가 바뀌는 것이다.” 과연 어디를 둘러보아도 폐허뿐인 오늘의 도시들 가운데에서, 처음인 듯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이 새로운 응시로부터 만이 다시 희망할 힘이 솟을 것임을, 그는 덤덤히 암시한다.

한편 “올모스트” 시리즈가 진행되면서 매 작품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은 에피소드들 간에 점점 더 정교한 패치워크가 완성되어 간다는 점이었다. 석관 편에서는 비교적 제각각이던 여덟 개의 에피소드가 상수나 문원 편에서는 따로인 듯 그러나 절묘하게 물고 물린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에는 시간이라는 심급의 개입이 큰 작용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이들 공동체의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닌, 변화 중에 있는 새로운 리얼리티로서 지각된다. 그리고 이는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간극에 픽션들이 도래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가령 그때 당인리 발전소는 정말로 폭발해버렸고, 그로 인해 어느 미래에는 잊혀진 것들에 대한 애도가, 사라진 장소로의 회귀가, 나아가 지역의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또 과천고의 두 전학생은 마침내 감독이 되고 배우가 되어 2020년의 핵폭발 에피소드를 촬영하기에 이르렀으며, 극중극 내부적으로 보자면 미술관 옆 동물원의 여자는 결국 정치인이 되었기에 시민들에게 대피를 알리는 중책을 맡을 수 있었다. 이처럼 과거와 현재는 미래 속에 끝없이 기입되고, 커뮤니티는 그렇게 또 한 번 확장된다. 유령이 아닌 ‘산’ 자들은 또한 앞으로 ‘살아갈’ 자들이기도 함을 작가는 언제나 잊지 않는다. 일상에 틈타는 픽션을 힘입어, 연극은 공동체와 손을 잡고 나아간다. “올모스트” 시리즈는 그렇게 지금, 여기, 인천의 문학동에까지 이르렀다. 하여 이번 시리즈에서는 특별히 개화기와 6.25를 포함한 먼 과거가 끼어들고, 심지어 전생의 사랑까지도 의뭉스레 난입하며, 미래 풍의 신도시, 우주에 울려 퍼지는 베토벤, 해가 지는 바다와 해가 뜨는 자유공원이 아름다이 산재한다. 옛날에도 이러했고 앞으로도 이러할, 계속 살아가기 위해서 때론 아플지라도 알아야 할, 사랑해야 할, 풍경들이 그려진다. 완전함이 아니라 “올모스트”이기에 저 시공은 아직 확장될 틈새가 남았다. 올라야 할 무대가 남았다. 언제나 다시 그것을 채우는 몫은 관객에게 돌려질 것이다.

2014 인천아트플랫폼 공연사업 결과보고집, <창작-제작-공연>의 뒷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