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포항바다국제공연예술제 2012.8

바다는 한적했다. 맞은편 육지에 우뚝 솟은 거대한 공장 단지가 보였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2012년 8월, 말복과 입추가 겹쳤던 그 날 저녁에, 포항 북부해수욕장은 몸매를 뽐내며 피서를 즐기러 온 타지의 사람들에게도, 한여름 떠들썩하게 축제를 벌이는 익명의 주최측에게도 속하지 않았다. 지극히 고요하게, 바다가 있었고,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 뭉클한 풍경의 보이지 않는 하나의 점이었던 것에 대하여 아주 오랫동안 무한히 만족할 것이다.

엄마는 구룡포에서 태어나셨다. 아빠와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 태어난 곳으로 함께 여행을 다녀오신 적이 있다고 하셨다. “토끼 꼬리에서 태어난 계집”이라며 할아버지는 평생 엄마를 놀리셨다고 한다. 나에게 포항은 (어렸을 땐) 토끼 꼬리 삐죽 튀어나온 데 자리한 도시, (이제는 포스코로 통칭된) 포항제철, (그리고 지금은) 좋아하는 야구선수가 고향을 떠나 고교시절을 보냈던 곳 정도로 소소하게 기억되는 장소이다. 대게 직판장에 들러 살이 통통하게 오른 대게를 쪄먹으려고 야심차게 찾아갔던 구룡포는 대게 철도 과메기 철도 한참 지나 있었다. 대신 선택한 물회는 찐득한 한낮의 더위를 팽팽하게 당겨줄 만큼 감칠맛 나게 새콤달콤했다. 구룡포에서 호미곶으로 가는 드라이브길은 그리운 얼굴들이 살고 계신 천국인가 싶게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호미곶이라는 지명은 “토끼 꼬리”라는 오명을 떨치고자 나는 호랑이라고, 호랑이 꼬리라고 한없이 제 이름을 선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지도가 호랑이처럼 생겼음을 증명하는 그림을 처음으로 보았던 고등학교 지리 시간, 한 남자아이는 폭소를 터뜨리며 “저렇게 채워놓을 거면 뭐든 될 수 있겠다, 아예 용이라고 하지 그래”라고 비웃음을 웃었다. 나는 그 아이의 비아냥을 즐거워하며, 호미곶 바다 곁에 커다랗게 그려진 호랑이 지도 그림을 또한 사랑스러워 한다. 국토대장정을 떠나온 젊은이들이 깃발을 흔들며 호미곶 끝까지 걸어가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들 뒤에서 행여 사진에 찍힐까 번쩍 손을 흔들어본다. 생각해 보면 그 어느 바닷가마다 땅끝이 될 수 있을 터, 그들은 그 많은 국토의 땅끝을 들르며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다잡고 있을까. “상생(相生)의 손”이라는 흉측한 조각물이 바다에서 툭 튀어나와 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끝에 손톱처럼 앉아있는 바닷새들의 쉼은 평화롭고 다행스럽다 생각해본다. 동행한 프랑스인 할아버지는 저것이 살려달라고 도움을 청하는 손인가 하고 묻는다. 아니라고 웃으면서 나는 어딘가 간절히 도움을 청하고자 손을 뻗고 싶은 마음이 솟는 것을 느낀다. 이토록 아름다운 끝에 내가 있다고, 나를 생각해 달라고.

축제 개막 전날에는 포항문화예술회관에서 일본의 극단 문화좌(文化座)가 <오타루의 여인들>이라는 작품을 공연하였다. 공연장에 도착하자마자 난데없이 신분증 및 핸드폰을 저당 잡히고 동시통역기계와 이어폰을 건네받는다. 팸플릿에는 “한국 톱 성우들의 현장 목소리연기”라는 글자가 자랑스럽게 박혀 있다. 오페라 나비부인과 꼭 닮은 세트에, 기모노를 곱게 입은 여인들, 그 방 안에 앉거나 서서 말하는 것으로, 말로만 채워지는 연극, 게다가 그 말이 더빙된 한국어로 귓가에서 쟁쟁거리고 있다는 사실! 성우들은 밋밋하게 글을 읽는 것과 과장된 연기를 펼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팡질팡한다. 연극을 더빙으로 볼 수 있다고는 한 번도 꿈꿔본 적이 없는 터였다.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영화도, 심지어 무슨 국제회의도 아니라 연극인데, 연극인데! 자막을 통해 보는 외국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이 없었을 포항의 시민들을 위한 배려였으리라 짐작해 본다. 허나 그 마음 씀씀이와 투자된 돈이 아까울 지경이다. 그러면서도 어떤 장면은 순전히 그 더빙의 힘으로 배꼽 빠지게 재미있기도 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가까이 붙였다 뗐다, 일본 배우들의 목소리와 한국 성우들의 이야기 사이에서 번뇌하면서, 그래 연극이 스스로 잘났다고 연극만을 주장해 무엇하랴, 그렇다고 연극을 또 이렇게 멋대로 망가뜨릴 건 무어냐, 유쾌한 당혹감을 느낀다.

1968년 4월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창립되었다. 그리고 이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렵사리 자본을 대고, 영일만을 메웠다. 창립 10주년이 되던 해, 박정희 대통령이 “철강(鐵鋼)은 국력(國力)”이라고 쓴 친필을 하사했다. 그 말은 이미 현실화되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은 근대의 시작 단계에서 식민과 전쟁으로 인한 비자발적 단절을 상흔으로 새긴 나라다. 이 나라의 예술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그 단절의 심연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그것을 메우려는, 혹은 자신의 일부로 껴안고 가려는 시도가 예술에서도, 그 작은 바다 한 켠에서도 오래도록 진행되어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역사의 단절을 불평만 하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 사람들에 의해서였다. 포스코 포항 공장에서는 세 종류의 1차 자원을 철로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 건물들은 각자가 담당한 1차 자원의 색깔을 띠고 있다. 그 주위의 나무들도 누렇게, 붉게, 그러나 아주 시들시들하지는 않게, 자신들이 낳는 철의 색을 입었다. 박물관 안에는 이렇게 쓰인 비석이 놓여 있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지켜 보아왔고 또 앞으로 많은 사연들을 말해줄 이 외로운 나무들을 우리 다함께 알뜰히 지켜줍시다 – 우리 모두.” 쇠가 연단되는 공장 안은 겁이 날 만치 뜨거웠다. 붉게 달아오른 쇳물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졌다. 포스코 역사박물관의 마지막 코스는 세련된 영상실에서 의자의 진동을 함께 느끼며 4D로 감상하는 영상이었다. 그 첫 부분은 철로 낼 수 있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로 채워진다. 아이를 태운 자전거 바퀴가 굴러 가고, 소가 쟁기를 끈다. 벼를 타작하는 기계도, 밥을 짓는 쇠로 된 가마도 나온다. 꽁꽁 언 강 위에서 아이들이 썰매를 친다. 한껏 미화된 감이 없진 않지만, 그 영상은 전에는 미처 생각해본 적 없던 철의 소리를 듣게 하였다. 철의 진동을 느끼게 하였다. 예의 그 비석이 기리고 있던, 외로운 나무들 생각이 났다.

올해로 12회째를 맞는 포항바다국제공연예술제는 그 횟수가 무색하리만치 준비가 미흡하기 짝이 없었다. 북부해수욕장 백사장에는 작은 무대 여덟 개와 큰 간이 무대 하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저녁 다섯 시 반부터 밤까지, 여덟 개의 무대에서 온갖 퍼포먼스, 연극, 음악 공연, 퍼레이드 등이 차례차례, 또는 적절히 겹치며 펼쳐지기로 예정되어있었다. 나는 일찌감치 도착해 일정표에 표시를 하며 이리저리 걸어 다닐 생각에 잔뜩 신이 났다. 그러나 여섯 시가 되어도, 일곱 시가 되어도 공연은 시작될 줄을 몰랐다. 사무국에 우여곡절이 있어 한달 전에야 제대로 된 팀을 꾸렸다는 말을 얼핏 전해들은 기억이 났다. 작년의 축제는 해수욕장이 아닌 포항역 근처에서 열렸었다는 사실도. 그렇다 해도, 또 아무리 개막날이라지만 이래서야 되겠나, 안쓰런 마음이 들었다. 이상하게 조금도 화가 나지는 않았다. 만약 서울의 어느 축제였더라면 분명 화가 났을 것이었다. 이번엔 그렇지가 않은 것이 일종의 역차별 같아 살짝 민망해졌다. <해변의 웨딩(라마라마)>이라는, 좀비들의 결혼식을 무용으로 보여줄 팀과 <캐리비안의 해적(프라나)> 무용 팀이 순서를 기다리다 지쳐 서로 술래잡기를 한다. 좀비들이 달려들자 꼬마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달아난다. 자원봉사를 하는 중고등학생 아이들은 계속 뛰어다니며 관객을 모았다. 관객이 모여도 공연은 시작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각자 별도로 맡은 스테이지가 있는 듯했다. 우리 공연 좋아요, 나중에라도 꼭 다시 와주세요. 자꾸 늦어져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 아이들은 “우리 공연”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썼다. 마침내 일곱 시 반 정도가 되자, 드디어, 그러나 그다지 극적이지는 않게, 스멀스멀 하나 둘 공연이 시작되었다. 해수욕을 하는 사람도 산책하는 사람도 거의 없어 보였던 조용한 백사장에 어느덧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리를 잡고 선다. 공연은 민망하리만치 단순한 마임 종류, 아니면 밴드의 음악 공연 류에 불과하다. 부끄럽고 실망스럽지만, 거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있는 사람은 장담컨대 나 하나뿐이었으리라. 연인들도, 가족들도, 노부부도 걸음을 멈추고 바닷가 공연에 눈길을 준다. 세상에서 가장 호의적인 눈빛이다. <미스터 김의 꿈속의 꿈(극단 바바서커스)>에서 미스터 김이 타이프를 치고 있다. 종이가 날린다. 백사장 위의 관객들은 종이를 주우며 즐거워하고, 계단 밖 아이들은 티 없이 엄마를 붙들고 묻는다. “저기 종이에 뭐라고 적혀 있을까요?” (아이야, 저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아, 라고 말해줄 자격이 과연 나에게 있을까.) 일본 밴드의 <스트리트 색소폰 앙상블(HIBI Chazz-K)>이 공연되는 백사장 무대에는 한 무리의 백인들이 막춤을 춘다. 실제 교편을 잡고 있는 대여섯 명의 선생님들로 이루어진 아마추어 밴드의 <어깨동갑 메들리(어깨동갑)> 공연에서는 아직도 가까운 바닷가 쪽에서 행해지고 있다는 별신굿을 모티프로 한 “할머니”라는 곡이 연주된다. 한 무리의 아이들이 장대같이 높은 신발 위에서, 꽤 오래 연습했음이 분명한, <춤추는 바다(나무닭움직임연구소)> 퍼레이드를 펼친다. 그들은 물고기도 되고, 학도 되었다가, 그냥 그들 자신도 된다. 그들 자신도 된다.

개막작은 무려 극단 목화(오태석 연출)의 <템페스트>다. 원래부터 맨발로 공연하는 목화의 배우들을, 발바닥에 모래가 흥건히 들러붙는 백사장에서 만났다. 무대에 세트를 세울 수도 막을 칠 수도 없어, 그들은 무대에서 백사장으로 무작정 뛰어내려 퇴장을 했다. 오리 탈을 쓰고서, 염소 탈을 쓰고서. 사실 개막 공연 전에는 떠들썩한 행사가 있었다. 모르긴 해도 시장님의 인사말씀이며 지역출신 트로트 가수의 공연 등이 <템페스트>의 앞자리를 채웠던가 보았다. 그리고 거기 빼곡히 모인 포항의 아줌마 아저씨 할아버지 할머니 꼬마 관객들은 그 모든 것을 여과 없이 주욱 감상해야 할 모양이었다. 개막행사를 끝내고, “여러분, 포항에 사니까 행복하시죠?”라는 낯 뜨거운 사회자의 인사와 격에 맞지 않는 소개를 뒤로, 연극이 시작되었다. 너무 넓은 야외무대라 극단은 평소라면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마이크의 힘을 빌렸다. 아무리 봐도 그들로서는 져주고 들어가는 게 너무 많았다. 게다가 바다를 이기기에는 마이크도 역부족이었다. 관객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다. 그 주위로 포항 방송국에서 나왔다는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따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배우들을 대신해 내가 다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운 것. 연극은 계몽이 아니므로. 괜히 걱정하거나 조바심내지 않아도, 결국 남아있는 자들에게 연극은 그저 자연스레 스르르 그 힘을 발휘한다. 사람과 예술이 진실하게 만난다는 것은 언제나 그러하다. 프로스페로의 마술 하나에, 그러니까 약속에 따라 배우들의 손에서 튀어나오는 꽃 한 송이, 빠알간 벼개 하나에 백사장 곳곳에서 함박웃음이 터진다. 노래가 나오면 경쾌한 곡조든 구슬픈 곡조든 박수부터 치고 보는 아줌마들, 연극이 뭔진 몰라도 거 춤추는 거 참 멋지구나 싶은 황홀한 표정들, 입 벌리고 푹 빠져 좋아하며 보시다가도 방송국의 인터뷰에 친절히 응해주시는 할아버지, 마지막에 프로스페로의 부채를 받고는 어안이 벙벙하여 가만히 서 있던 꼬마 아이와 그 아이를 부러워하던 수많은 아이들의 탄성, 연극 속에서, 자유를 얻고 춤을 추며 떠나던, 마법에서 풀려난 허재비들, 장승처럼 평생을 함께 살기로 한 신라국의 세자와 가락국 옛 군주의 어린 딸.

그리고 관객이 주인공, 이라는 빈말은 마치 오직 그 순간 그 바닷가의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포항에 사는 것이 행복하다”기보다, 어쩌다 인생이 흘러 흘러 포항이라는 곳까지 와 살게 되었고, 행복한 일도 슬픈 일도 겪을 만큼 겪었고, 또 어쩌다보니 그 밤 북부해수욕장 간이무대, 발이 모래에 푹푹 빠지는 의자에 앉아,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저것이 셰익스피어인지도 오태석인지도 모른 채, 마술을 부리니 환성을 지르게 되고 노래를 하니 박수를 치고 싶은, 그런 사람들, 그런 마음들이, 거기 있었을 뿐이었던 것. 물론 축제는 미흡했다. 예술은 아직 사람보다, 바다보다 어리석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그들을 위해서, 예술은 스스로 좀 더 나아져야 할 충분한 이유를 얻었다. 그 아름다운 발생의 순간을 기억하고자 한다.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2.8 http://indienbob.tistory.com/6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