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아웅다웅스,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 아트선재센터, 2012.3-2012.4
2011년 페스티벌 봄에는 한스-페터 리처(Hans-Peter Litscher)의 <웃는 소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있었다. 종로구 원서동 좁은 언덕길, 박잉란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작가는 그가 자던 방, 소중하게 간직한 물건들, 책들, 옷가지 등을 보여주며 그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가의 안내에 따라 그의 집을 둘러본 관객들은 6.25 전쟁 때 쌍둥이 누이와 헤어진 뒤 세상을 떠돌았던 그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해 자못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고, 그러면 작가는 한층 더 진지하고 장황하게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물론 하필 그 날 그 시각 나와 함께 그 집에 들어갔던 관객들이 지나치게 순진했던 탓도 있을 것이고, 그 즈음 내가 워낙에 페스티벌 봄이 풍기는 젠 채하는 냄새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던 탓도 있으리라. 어쨌든, 나는 그 진지한 대화들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고, “장난해? 다 개뻥이잖아!” 하고 외친 뒤 집을 박차고 뛰쳐나오고픈 욕망이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한 귀퉁이에 쓰여 있던 위대하신 파란만장 박잉란씨의 영어 이름, ‘Parking Lot’을 말이다.
그런데 여기, 허구적으로 구성된 인물을 대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있다. 이 방식은 진지함을 억지로 가장하지 않으며, 그 진지함에 가담함으로써 함께 하나의 위압적인 세계를 만들어 그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을 소외시키는 식의 권위적인 관람 방식도 없다. 도리어 여기서 비실체는 그냥 비실체로 남아있다. 인생도 예술도 한바탕 놀아보자는 것뿐, 어차피 전부 뻥인데 뻥을 가리려 또 뻥을 칠 필요야 없지 않겠는가 하는, 당당하고 호탕한 청춘의 방만함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으쌰으쌰 신이 났다. 바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지난 3~4월 한 달에 걸쳐 전시, 공연되었던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의 이야기이다.
‘더아웅다웅스’(밴드 ‘파블로프’의 보컬 오도함과 베이시스트 박준철 둘이서 얼떨결에 공연기획의 세계에 뛰어들어 아웅다웅거리고 있다는 후문)는 펑크라는 음악이 갖고 있는 진폭에 대해 고민하던 중 북조선 최초이자 최후의 펑크 록커 ‘리성웅’의 일대기를 구성, 전시하게 된다. 뜻을 함께한 남조선의 9개 밴드가 아트선재센터 3층 전시실 공간을 나누어 리성웅의 일생 중 각 한 시기에 해당하는 사건 혹은 이미지를 자유롭게 전시하고, 총 세 차례에 걸쳐 돌아가며 공연을 펼치는 형식이다. 프로그램 구성은 다음과 같다.
탄생(誕生) – 3월 23일(금) 공연
1. 레닌그라드에서 보낸 유학시절(遊學時節) 그의 아파트 앞을 흐르던 강 – 쾅 프로그램
2. 유년시절, 몸이 좋지 않아 요양을 떠났던 팔보산(八宝山)의 온천 – 팔보야마
활약(活躍) – 4월 1일(일) 공연
3. 함격북도 회령의 산 아래 숨겨져 있는 그의 해적(海賊) 라디오 방송국 ‘외곽전철’ – 노컨트롤
4. 북(北)의 오렌지족(族)인 놀새족 행세를 하며 기거했던 평양시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빌라 ‘Taedong Diplo’ – 서교그룹사운드
5. 그의 연주(演奏)가 흘러나왔다는 함경도 근처의 한 블루스 술집 – 악어들
몰락(沒落) – 4월 13일(금) 공연
6. 고난(苦難)의 행군(行軍) 시절, 산속에 은둔한 그의 광기(狂氣) – 무키무키 만만수
7. 비사회주의(非社會主義) 단속(團束)에 의해 처참(悽慘)하게 유린(蹂躪)된 그의 인권(人權) – 밤섬 해적단
8. 일기를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인간 리성웅 내면의 이야기 – 파렴치악단
9.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자라나는 리성웅 키드들의 아지트 ‘노동당사’ – 파블로프
실제 전시 공간은 9개 구역으로 쪼개어져, 아주 상징적이고 간결한 방식으로 리성웅의 일생을 도처에서 환기시킨다. 예를 들어 함경도 근처의 블루스 술집은 꽃 넝쿨 수박 넝쿨이 드리워진 피아노 한 대로, 평양 놀새족의 빌라는 후면에 알록달록 야경이 그려진 커다란 금붕어 어항으로, 또 레닌그라드의 강은 비스듬히 놓여 있는 검은 판자 하나로 깔끔하게 구현되었다. 한편 꽤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전시를 펼쳐낸 팀도 있었는데, 가령 비사회주의 단속으로 유린된 리성웅의 인권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드럼과 그 앞에 즐비한 압수품들로, 인간 리성웅 내면의 이야기는 꾹꾹 눌러쓴 그의 긴 일기로 그려졌다. 각 밴드가 나름의 방식으로 고민하고 펼쳐낸 전시 형식들은 무척 신선했고, 여기에 각 전시를 완성하는 한 번씩의 공연들이 덧붙여짐으로써, 프로젝트에 대해 취하는 각 팀의 거리나 태도가 다채롭고 유연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리성웅이라는 거룩한 영웅의 삶에 각자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하면서도 돌아서선 이건 다 뻥이야 하며 놀아제끼는, 태도와 행위의 균형, 전시와 공연의 균형이 참으로 좋았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끝까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균형은 깨뜨려졌다.
탄생(誕生) – 3월 23일(금) 공연
이 날 나는 리성웅을 처음 만났다. 우랄기타를 쳤던 북조선의 펑크 록커라는 설레는 명성이야 익히 들은 터였다. 전시장을 둘러보는 마음은 두근거렸고, 기획의 참신함과 전시 구성의 (약간 서툰듯한) 섬세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첫 번째 공연은 ‘쾅 프로그램’, 수줍게 보이는 두 청년이 밴드의 기존 곡들을 전혀 수줍지 않은 강렬함으로 공연하고, 이어 리성웅을 위해 지었다는 ‘강’이라는 곡을 플루트 연주를 곁들여 러시아어로 열창한다. 두 번째는 팔보산의 금빛 온천에서 열린 ‘팔보야마’의 퍼포먼스. 밴드 보컬이 경상도 사투리로 “안녕하세요, 저는 리성웅입니다.” 라고 인사를 한다. 터져나오는 폭소. 혹여 그때껏 리성웅이 실존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에 시달리고 있었을 몇몇 관객들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리성웅이 아닙니다.” 라고 확인 도장을 찍어준 셈. 그 유쾌함을 이어 그는 옷을 훌렁훌렁 벗더니 팬티 차림으로 온천에 들어가 빨간 바가지로 계속 물을 끼얹는다. 미디 음악이 깔리고, 벽에는 초원을 달리는 말의 영상이 나온다. 거기에 그는 랩을 입힌다. 경상도 출신 래퍼 리성웅은 사뭇 진지했지만, 우리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카메라를 들이댈 뿐. 이어 온천에서 나온 그는 흰 가운을 입고, 관객들이 앉아있는 쪽으로 걸어와 누군가와 몇 마디를 중얼대다가, 사람들 사이에 쓰러져 눕고 만다. 아, 우리의 리성웅이 요양을 갔었지만 허약한 몸이 다 낫지는 못했나보다, 하고 우리는 또 웃는다. 리성웅이라는 허구의 인물, 그리고 그를 연기하는 실제의 인물 양자에 대한 유쾌한 거리두기.
활약(活躍) – 4월 1일(일) 공연
뱃지를 달고 당당히 입성하니 ‘악어들’ 공연이 한창이다. 중앙의 피아노에는 뚜껑이 비스듬히 열려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고, 거기서 보컬이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른다. 피아노 의자는 텔레비전 모니터 세 대를 이어 만든 것으로, 각종 북조선의 음악공연 영상들이 나오고 있다. 평양대동문유치원의 ‘장군님과 아이들’ 공연에서 꽃분홍 옷을 입고 그랜드 피아노를 치는 어린 여자아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돌파하라 최첨단을’에서 키보드를 어깨에 매고 서서 연주하는 청년들, 그리고 지금 여기에서 함경도 근처 한 블루스 술집의 리성웅을 추억하며 록에 젖는 서울의 영혼들. 천장에는 다음과 같은 밴드의 전언이 한 편의 노래 가사처럼 투사된다. “우리는 그가 견뎌온 시간들과 마주친 죽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맥주를 마시면서 들었다. 이태원의 어느 술집에서 우리는 리성웅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어서 다음은 반짝반짝 예쁜 어항 앞에서 노는 ‘서교그룹사운드’의 공연. 평양 놀새의 사랑 노래를 리성웅에게 헌정하며 이들 역시 청춘답게 능청스럽고 당당하다. “저희가 맡은 역할은 ‘놀새’라고, 오렌지족이에요, 북한의. 뭐 별거 없더라고요, 알아보니까. 비슷해요 우리하고. 노래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솔깃한 제안. “전시가 끝나면 이 어항이 쓸모가 없대요. 가져가고 싶으신 분 신청 받을게요.” 그렇게 그들은 노래했고, 우리는 놀았다. 사뭇 진지하게 이날의 대미를 장식한 ‘노컨트롤’이 전시실 구석의 해적 라디오 방송국에서 튜닝을 할 때도(이들의 덤덤한 첫인사도 압권, “실존인물인줄 알았는데 나중에 신문기사 보니까 뻥이더라고요.”) 나는 함께 간 이들과 팔보산 온천에서 물 튀기는 사진을 찍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리성웅 덕분에) 흥청망청 놀았다.
몰락(沒落) – 4월 13일(금) 공연
한 귀퉁이 녹색 그물망 안에 심상치 않은 북과 악기들, 거기서 ‘무키무키 만만수’가 괴이한 음색으로 은둔자적 광기를 토해내고, 긴 조명등 사이 깔끔한 무대에서 ‘파블로프’가 기타 줄이 끊어지도록, 웃통을 벗어제끼며 공연을 한다. 그리고 봄이 한창인 13일의 금요일 밤 나는 리성웅의 일기가 전시돼 있는 단상 위에 올라서 있었다. 리성웅의 우랄기타 그림을 꼭 한 번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일기장에서 하필 그 부분이 잘려 나간 것에 무척 아쉬워하면서. 세 차례의 공연이 리성웅의 탄생과 활약과 몰락을 따라오는 동안 나의 감상 역시 ‘졸라 재밌다’에서 ‘재밌다’에서 ‘이게 뭐지’로 점점 바래온 것을 느끼면서. 더 이상 한껏 어울려 놀지 못한 채, 놀고 있는 저들을 아주 먼 풍경인듯 바라보면서.
Talking Heads의 송라이터인 David byrne의 TED 강연 ‘How architecture helped music evolve’에서는 공간과 음악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에 대해서 논한다. 새들의 음역대와 그들이 생활하는 고도의 관계, U2의 미들 템포 록발라드와 아레나 뮤직의 관계, 바흐의 음악과 교회건축의 상관관계는 그 예가 된다. 나 역시 그 강연에 공감하는 바 FF, Freebird와 같은 로컬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하는 밴드와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공간의 맛을 착취하려는 간악한 시도와 함께하는 밴드는 서로 달라야 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다양한 공간과 다양한 방향 그리고 그것을 소비하는 다양한 관객이겠다. (오도함, Uh-oh Love Comes to 꿀 中에서, <칼방귀> 수록)
<칼방귀>에 실린 오도함의 글을 보면 공연 기획을 시작하게 된 이래로 그가 만났던 다양한 공간들과, 그 공간에서 음악이 제대로 공명하고 소통되도록 만들기 위해 그가 기울였던 수많은 노력들, 진중했던 고민들을 엿볼 수가 있다. 그러나 아주 인상적인 그 글은 다른 한편으로 볼 때 ‘음악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공간에만 다분히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그 공간들은 무엇보다 음악을 잘 연주하고 음악 관중들과 한판 잘 놀아보기 위한 공간일 뿐인 것으로, 이때 시간성이나 서사성의 문제 등은 공간성의 문제 속에 내포된, 하나의 덩어리로써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도함은 다음 프로젝트인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을 소개하며 이렇게 글을 끝맺고 있다. “미술관은 처음이지만 위기를 통제해 온 순발력과 고육지책이 통하지 않는 공간으로 알고 있다. 가까운 문제풀이에 중점을 두었다면 이번에는 긴 호흡과 리서치를 통해 주제를 풀어나가 보고자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위기를 통제해 온 순발력과 고육지책’이 여전히 음향적인 문제나 음악적 기술의 문제와만 연관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되었다. 실제로 그는 ‘긴 호흡과 리서치’를 통해 리성웅의 일대기를 구성하고 전시를 기획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점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내 짧은 생각이지만, 음악이 장악하는 공간성 속에 리성웅의 삶의 서사성이나 미술관에 새겨지는 시간성이 함몰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컨대 음악-공간은 그 순간 번쩍 하고 저 혼자서만 폭발해나갈 뿐, 미술관도 리성웅도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물론 마지막 두 팀의 공연을 보지는 못해 속단할 수는 없지만) 팔보야마의 온천 퍼포먼스를 제외한 모든 공연은 각 밴드의 기존 노래들을 각자가 전시해놓은 설치물 앞에서 연주하는 것으로서 일괄적으로 펼쳐졌다. 그들은 리성웅을 위해서, 리성웅을 생각하며, 또는 리성웅을 재현하고자 특별히 한 곡씩을 더 만들었고, 그 한 곡이 그들의 공연 속에 아주 잠깐씩 삽입될 뿐이었다. 거칠게 보자면 말이다. 전시를 찾는 이들은 또 어떠한가. 전시회장(또는 공연장)을 세 차례 찾는 동안 나는 나처럼 세 번에 걸쳐 그 곳을 찾은 낯익은 얼굴들을 계속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에 이렇게 나누어 말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들은 전시 관람객이기보다는 음악 관객들에 더 가까웠다. 말하자면 기존에 그들 밴드의 음악을 즐겨 들었던 얼마간의 마니아층에 의해 이 공연은 향유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마도 리성웅을 위한 한 곡의 헌정곡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 그 곳을 찾은 것이리라.
그러므로 문제는 계속해서 ‘공간’으로 귀결된다. 그곳은 과연 미술관이었는가? 아니, 그래도 그곳이 미술관이라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지속적으로 존중되긴 했는가? 사실 정작 나를 실망시킨 것은 아주 작고 미미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고백하자니 약간 쑥스럽지만, ‘어항(魚缸)’이었다.
내가 처음 리성웅을 찾았을 때에 가장 좋았던 것도 저 어항이었고, 마침내 실망을 금치 못하고 돌아서게 만든 것도 저 어항이었다. 처음 좋았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너무 예뻐서.” 나는 그 예쁘고 기발한 전시품이 이 프로젝트가 점유한 미술관이라는 공간을 나름의 방식으로 존중하는 오브제가 된다고 믿었다. ‘개념’이 판치게 된 오늘의 예술계에서 가장 사소해 보이는 것으로 전락해버린 ‘형식’에 대한 고민과 치열함, 그것이 내가 요즈음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바라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북조선 펑크 록커의 가상적 삶을 구성하고 그에 관한 공연을 미술관에서 올린다’ 라고 하는 개념의 기발함이 그 자체로 ‘예술’이 될 수는 없으리라는 나름의 엄격한 잣대이자 경건한 믿음이랄까. 적어도 이 프로젝트가 그런 방만함을 넘어선 것이라는 희망을 나는 그 어항에서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공연을 보러갔던 날 나는 보고 말았다. 제대로 갈아주지 않아 혼탁하고 검게 변한 물, 그 속에서 그림자만 보이던 물고기들과, 희미한 불빛의 흔적만이 어둡게 비치던 평양의 풍경. (차마 그것을 사진 찍지는 못했다) 그것은 전시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공연만 마치면 그만이라는 식의 안일한 태도로 미술관을 무시한 데 대한 너무나 명백한 증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기회만 된다면 집으로 가져가 오래 두고 보고만 싶던 리성웅의 찬란한 평양 놀새 시절은 그렇게 내 눈앞에서 ‘몰락’해 버렸다. 쇠잔해진 전시품들과 쇠잔해진 그의 인생이라, 북조선 펑크 록커를 남조선의 청춘 록커들이 삼켜 버린 셈! 그 무책임도 일종의 의도된 태도이며 더럽혀진 전시품 역시 그 태도 또는 리성웅의 몰락을 반영하는 하나의 작품이라 할 것인가? 그런 식의 예술이라면 나는 그에 대해 파킹랏을 능가하는 환멸을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 역시 일종의 소외이니까. 어쩌면 더 어마어마한 소외. 친해지고 싶은 친구가 있었는데 같이 놀자 해서 좋아하며 갔더니 기대했던 그 모습이 아닐뿐더러 노는 게 노는 게 아니라 저 혼자 대장 놀이를 하더라 하는 심정 같은 것?)
‘아트선재 오픈 콜’ 프로젝트의 심사위원들은 심사평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전시라는 형식이 아니라 자신의 운동성을 성찰하고 작동시키기 위한 태도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전시는 규정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창조되는 것이다. 그것이 질문을 던지는 방법이 될 수도 있으며, 자신을 증명해내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요즘엔 이런 것이 이미 너무 판을 치고 있다는 사견) 그리고 그들은 더아웅다웅스의 프로젝트를 뽑은 이유를 이야기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한편으로 펑크의 저돌적 에너지가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것도 멋진 말씀. 그런데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나는 펑크라는 음악을 만나기보다 펑크라는 이름의 청춘을 만나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아마도 청춘은 고민을 다 제쳐놓고 마음껏 놀아제낄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기도 하지만, 신나게 놀면서도 사실은 정작 치열한 고민의 끈을 끝내 놓지 않는, 실로 찝찝하면서도 유쾌하고 상큼 텁텁한, 그래서 아름다운 시절이 아니었던가. 헌데 태도나 행위로서의 평면적인 저돌적임만 남아버린 청춘의 저 쇠잔함으로 하여, 나는 돌아서 전시장을 빠져 나오며 말 못할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우랄기타를 치는 리성웅이 문득 너무 보고 싶어졌다. 그의 부재가 이제는 더 이상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이 슬픔으로 하여 그대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랬다고, 기대했던 만큼 아쉬웠다고 그저 한 번 말해보는 것이다. 미술관에서 행해지는 음악 공연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요즘, 그 시도들이 다 그렇고 그런 것으로 전락해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작게 목소리를 내보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대들이 노는 것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었거든, 그건 되게 좋은 거였거든.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2012.4 http://indienbob.tistory.com/5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