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직 연극에 남아

배삼식의 각색 에 관하여 (2022.8) “죽음, 죽음… 죽음이 죽음을 부르니, 천지사방에 온통 죽음뿐이로구나.”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거트루드는 클로디어스가 영국 왕에게 보낸 밀서의 존재를 모른다. 그는 죽은 남편의 슬픔과 아들의…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

좋은 작품을 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가 글을 쓰고 싶어진다. 그 작품에 대한 것일 수도, 전혀 아닌 것일 수도 있는 글을. 그 충동을 따르지 못하던 시절이 내게 있었다. 박사…

세 번째 날들

학생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어떤 걸음으로 강의실에 들어오는지, 어떤 꾸벅임으로 조는지, 어떤 필기구를 사용하는지, 어떤 눈빛으로 경청하는지, 어떤 몸짓으로 질문하는지, 다가오는지, 푸르른지. 그것을 볼 수 없으니 다른 것들을…

버드나무

김문석 ‘우연의 정원’ 영상을 위한 나레이션 (2019년 12월) 생이 고단할 때면 만났던 식물들과 만나게 될 식물들을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집이 될 수는 없어도 몇 잎의 푸름들에게 집을 내어줄 수…

두 번째 날들

9월의 첫주에는 깁스를 하고 목발을 짚고 학교에 갔다. 비가 내렸다. 뼈는 서서히, 느리게 붙었다. 그 가을, 걸어서 갈 수 있는 내 세계의 끝은 다만 몇 개의 강의실이었다. 어떤…

마지막 더스크랩 – 해피투게더

갈라놓인 우리를 이어주는 것들

임흥순, 우리를 갈라놓는 것들 Things that Do Us Part (2019) 을 위한 글 © 임흥순 풍경 일렁이는 강물, 노을진 산등성이, 내려앉는 밤, 낮의 산허리 위를 지나가는 구름들의 빠른…

우주적(宇宙的) 식사

이서재 전시 ‘우주적 _ 宇宙的’ 을 위한 에세이 (2019년 10월) 천문학적 공간으로서의 우주를 떠올리면, 그것은 나의 아득한 바깥 같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어렴풋이 그려보면서도 그 까마득한 거리에 압도당할…

마지막 날들, 첫 학기

나는 어디에서도 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스스로 길을 찾기에는 무력했으므로, 어딘가 아직도 내게 열리는 문이 있다면 그저 따라가리라는 마음으로, 먼 곳의 해안을 걷다가 문득 기별을 받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더운 여름이었다. 9년 전이었다. 아비뇽 연극제에서 프랑스 연출가 알랭 티마르와 한국 배우들이 이오네스코의 코뿔소를 올린 해였다. 상징적인 무대와 간결한 각색, 라이브로 더해지는 한국적인 타악 연주는 이미 원작에 익숙한…

2019년 봄, 글들

하여 café 라는 말을 입 속에 굴려보노라면 많은 풍경들이 내게 밀려온다.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봉지를 붓고 두어 번 휘 저어 마시다가 끝에 가서 만나는 달콤한 농축. 좁고 동그란…

7번국도

남은 생 동안 매일 밤, 이 연극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먼 도로에서 전복된 자동차의 흩어진 부품 사이, 영영 모를 타인의 아픔 어두운 구석에 앉아, 어떻게 모든…

조지아라는 나라, 설산의 엑스 광선

2018년 여름

조금 덜 슬픈 이별 – 남산동 A의 집

2016년 12월 28일 대한민국 경주 남산동의 기와를 올린 양옥 A의 집 프랑스에서 유학하다 같은 시기 한국에 다니러 온 한 친구는 벌써 여러 달 전부터 부산에 놀러오마고, 거기서 만나자고…

조금 덜 슬픈 이별 – 아현동 M의 집

2016년 12월 20일 대한민국 서울 아현동의 연립주택 1층 M의 집 7살 겨울에 이사를 와 32살 겨울까지를 꽉 채워 살았다. 그보다 앞서 몇 년 간 네 식구는 같은 동네에…

조금 덜 슬픈 이별

꿈을 꾸었다. 눈 깜박하는 사이에 지나가버린 아주 짧은 꿈. 오래 잊고 있던 한 장소가 생경한 얼굴로 꿈에 나왔다. 여전한 잠결에 깨어 그곳이 어디였나 더듬어보니, 큰아버지댁 안방에 달린 화장실이었다….

바닷가 모래언덕

2018년 봄

연극을 끝까지 보기 위하여

프랑수아즈 : 너는 클레르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의 엄마에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렌 : 난 할 거야, 그래야 하니까. 우리가 돌아가고자 하는 건 진실이 알려져야 하기…

김동현 선생님께

저는 지금 창경궁이 내려다보이는 호텔방에 있습니다. 깊은 밤 궁은 짐승처럼 캄캄해요. 날이 밝아오면 내일은 대온실에 가볼 예정입니다. 그곳을 거닐며 제가 무엇을 생각할지는 자명해요. 언제부터 이토록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는지…

짧은 이별들로 구성된 삶은 시계추처럼 장소를 옮기고

오늘 현숙에게 서프라이즈를 했다. 얼마 전 추운 밤 건물 앞에 서 호빵을 나눠먹으며 그날 한식당의 생일떡 서프라이즈에 울었다는 한 아이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서프라이즈 싫어, 성실한 설명을 원해,…

집으로 돌아간 사람

이서재 ‘집전’ 에세이 (2017년 9월) 빈 집, 빈 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모두가 익숙한 것, 사랑하던 것,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아끼던 공기는 이토록 차갑고, 숨쉴 수 없는…

의미보다 간절한 몸들의 편력

서한겸 ‘많은 여행과 큰 외로움’ 전시 서문 (2017.10.10-10.17) 얼마 전 가수 요조는 ‘나는 아직도 당신이 궁금하여 자다가도 일어납니다’ 라는 긴 제목의 단편영화 형식으로 앨범을 발매했다. 앨범을 사서 노래를…

고독의 질감

이민휘 1집 ‘빌린 입’ 을 듣고 실은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쓰려 했었다. 그녀가 언젠가의 한국행 비행기 안에서 ‘침묵의 빛’ 을 썼다 했듯이. 거기, 구름 위에서, 무릇…

신데렐라, 재를 털어주는 이름

조엘 뽐므라(Joël Pommerat)의 희곡 신데렐라(Cendrillon)의 한 장면에 부쳐 때로 어떤 희곡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익명으로 존재한다. 또 때로 그 익명의 존재들은 이름을 가진 이들보다 쉬이 식별되고 기억된다. 말하자면 책장을…

창작에 대하여 (2014년 5월)

얼마 전 예술의전당에서 공연된 작품 중 하나가 루마니아 연출가 실비우 퓨카레테(Silviu Purcarete)의 2009년 작 와 심각하게 흡사하다는 이야기가 여기까지 전해졌다. 물론 전해진 것들은 실체 없는 풍문들에 불과하다. 몇몇…

가곡 실격

파리에는 백년만의 장마가 찾아왔다. 열흘 가량을 쉬지 않고 주룩주룩 비가 내렸다. 강가의 산책로로 내려가는 계단이 물에 잠겼고, 나무들은 수면 위로 겨우 지켜낸 잎새들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누런 흙탕물이 코앞에서…

국민 사직

리옹 구시가 높은 언덕 위에 자리한 생쥐스트 대성당에는 때마침 아베마리아가 울려 퍼졌다. 그 주일의 미사는 2차대전 승전기념일에 부쳐, 전쟁 중 사라져간 이들을 위한 추모를 겸하고 있었다. 주기도문을 왼…

2016년 2월 9일의 일기

“사람이 죽어도 머리카락은 계속 자라다가 어느 순간부터 자라기를 멈춘대. 머리카락은 어떻게, 영혼이 떠나간 것을 알까.” (코엔 형제, The man who wasn’t there, 2001) 누군가에게서 나를 향한 마음이 떠나는…

[번역] 나의 세대에게 보내는 편지 : 나는 테라스에만 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11월 13일 밤의 테러 직후 프랑스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고 주말 동안 극장과 미술관을 비롯한 모든 문화 기관이 문을 닫아걸었다.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공포의 기운이 모두의 일상 속에 침투했다. 그러나…

슬픈 노래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정민이는 8개월이었다. 겨울이었다. 그때까지 정민이는 부산집에서,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북적이는 사랑 속에 자랐다. 서울의 일상에 찌든 고모가 이따금 집으로 내려가면, 바닷가 집에서는 온통…

안티고네

2014년 7월 17일, 암스테르담을 떠나 쿠알라 룸푸르로 향하던 말레이시아 항공기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영공에서 폭격으로 추락했다. 그 후 일주일이 넘도록 시신들은 황야에 방치되었고, 무자비한 태양 아래 썩어갔다. 죽은…

세월

그 며칠 뒤 진세이는 멀리 있던 내게 정원씨 몸 조심하고 배 같은 거 타지 마요 문자를 보냈더랬다. 울고 있는 이모티콘에 뚝뚝 아픔을 묻혀서. 언젠가 한 아이가 지하철역 계단에서…

좀녜

김흥구, 좀녜, 2014 루나포토페스티벌 – 달과 사진의 밤 (Lunar Photo Night) 벗어 널어놓은 잠수복들이 처녀 적 몸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쭈글쭈글한 살결을 곁에서 함께 말렸다. 닳아 해어진 살이…

안녕

적절한 인사말이 무얼까 생각하느라 조금 기다렸다. 처음으로 그 어떤 공간을 열며, 아카이빙을 위함이라 하면서도 짐짓 손님 맞을 준비로 부산을 떨다, 그래도 역시 나의 첫 건네는 말은 안녕. 언젠가…

사라짐을 딛고 쓰다 – 공연예술비평에 대하여

김연수의 단편 에는 몸에 새겨진 먼 감각의 기억, 곧 “사랑했던 여자의 귀밑 머리칼에서 풍기던 향내나 손바닥을 완전히 밀착시켜야만 느낄 수 있는 엉덩이와 허리 사이의 굴곡 같은 것들”을 결코…

문화로서의 자전거

1. 망각의 전략 지난 여름, 부다페스트의 시나고그에서 무료 가이드를 해주던 한 유태인은 말했다. 헝가리 사람들은 홀로코스트를 잊었노라고. 오늘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기념하지 않고, 비판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심지어 그게 무엇인지조차…

일상의 풍경에 픽션이 틈탈 때

정진세 작가의 “올모스트” 시리즈에 대한 고찰 통상적으로 미술이나 연극에 있어 ‘장소특정적(site-specific)’이라는 수식어는 그 설치나 공연이 특수한 한 지점으로서의 장소를 점유할 때 따라붙는다. 가령 나치시대 대학살이 일어난 어느 병동이라든지…

섹스와 자위 사이

정금형, 7 ways, Festival Màntica 2013 볼로냐(Bologna)의 미술학도 출신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는 이탈리아 공연계에서 일찍이 환대 받지 못했다. 오히려 프랑스를 필두로 한 여타의 유럽 국가들이 그를 먼저 알아보고…

이토록 짠한 뻘짓의 향연

Vivarium Studio, SWAMP CLUB, Festival d’Avignon, 2013.7 (Photo_Christophe Raynaud de Lage) 이제는 극단 체제가 거의 소멸돼 버린 프랑스 연극계의 한구석에서 꾸역꾸역 제 길을 모색하다 어느덧 창단 10주년을 맞은…

욕망과 두려움 사이, 무지개다리를 건너 온 아이

삶이 아주 지치고 힘들고 외롭게 지속되던 그 언젠가, 아파트 단지로 난 길을 걷다가 투닥거리며 걸어가는 젊은 엄마와 어린 아들을 마주친다. 그 연극 속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삶으로부터 도망하여 그저…

좋은 예술

언젠가 좋다, 와 좋아하다, 가 같은 말인지 다른 말인지 하는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쓸 일이 있었습니다. 가치판단의 세 측면인 객관주의, 주관주의, 객관적 상대주의 개념들과 이를 연관시켜야 하는 과제였지요….

사람의 존재, 육체의 현존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도쿄데쓰락, 세 사람 있어!, 혜화동 1번지, 2012.10 지난 10월, 혜화동 1번지에서 공연되었던 (제12언어 연극 스튜디오)의 한 장면이다. (내용상으로는 두 사람의 대화이나 이를 세 명의 배우가 연기한다.) 재룡 :…

예술가의 목소리

엄마 아빠는 저의 첫 울음소리를 녹음하실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미처 녹음기를 챙기지 못했던 어느 여행길에 산통이 시작된 바람에 제가 세상에 나던 첫 순간은 기록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이후에…

무릎 위에 놓인 욕망

극단 성북동비둘기, 헤다 가블러,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2.10-2012.12 산부인과 의자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본 기억은 많은 여자들에게 생생한 감각으로 새겨진다. 임신이나 출산, 낙태와 아무런 관련 없이도 한 여자가 그 의자에…

예술가의 육체

눈 수술을 했습니다. 저 좋자고, 잘 보이자고 한 다분히 사치스런 수술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눈이 나쁜 것도 몸이 아픈 것이니 얼마만큼은 아픈 소리를 내봐도 되겠는지요. 실제로 각막이 덜 붙었다…

오직 관객에게 바쳐진 바다

제12회 포항바다국제공연예술제 2012.8 바다는 한적했다. 맞은편 육지에 우뚝 솟은 거대한 공장 단지가 보였다. 조금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2012년 8월, 말복과 입추가 겹쳤던 그 날 저녁에, 포항 북부해수욕장은 몸매를 뽐내며…

축제의 지역성

생각해보면 축제의 이름 앞에는 대개 지역명이 붙습니다. 가끔 ‘젊은’ 류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변방’ 같은 추상적 공간이 수식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방곡곡 지역의 이름들은…

축제의 축제성

Max Beckmann, Carnival, 1943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바흐친에 따르면, 중세나 르네상스의 카니발은 엄숙한 지배 문화를 유쾌하게 희화화하여 전복적인 파괴 및 창조적인 생성 양자를 풍성하게 발생시켰던 민중들의 축제였습니다. 애초에 고대…

야구와 연극

가령 이런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순간, 타자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어깨 너머 배트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수비수들과 주자들은 두 다리 가득 무게를 실어 다음 순간의…

일상지하(日常地下), 일상지하(日常之下)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공간리뷰 카페 일상의 지하에 위치한 실험극장 일상은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연습장이자 공연장으로 활용되지만 사실은 키 낮은 콘크리트 천장과 기둥, 시멘트 바닥이 그대로 노출된 지하실에 가깝다. 무대와…

마음의 가난

버거운 시기입니다. 모두들 가난합니다. 하물며 예술가들이야. 사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가난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천재론을 능가하는 예술가 가난론이 등장해야 할 판입니다. ‘예술가란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에 의존하는 천재’라는…

펑크라는 이름의 청춘

더아웅다웅스, 북조선 펑크 록커 리성웅, 아트선재센터, 2012.3-2012.4 2011년 페스티벌 봄에는 한스-페터 리처(Hans-Peter Litscher)의 라는 작품이 있었다. 종로구 원서동 좁은 언덕길, 박잉란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작가는 그가 자던 방, 소중하게…

청춘(靑春)에게 보내는 시(時)

김광석은 내가 5집을 미친 듯이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에 그만 죽어버렸다. 그해에 나는 대학을 졸업했다. 학업 성적이 우스웠으므로 취직 따위는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렇게 청춘이 끝나버릴…

예술(人)과 일반(人), 그 아슬아슬한 유희를 위하여

탄츠테아터의 장을 열었던 독일의 안무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는 사람의 몸을 움직여 춤추게 하는 그 무언가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라는 1978년 안무작을 두 차례에 걸쳐 다시 무대화했습니다. 65세 이상의…

경계에 선 하녀들

극단 성북동비둘기, 하녀들,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1.9-2011.10 연극이라는 것은 무릇 실제 자체와는 다른 것이기에 다소간의 과장을 언제나 수반할 수밖에 없다. 물론 과장이나 왜곡의 정도는 경우에 따라 다르다. 가령 어떤…

삶을 지속시키는 진동

Festival d’Avignon 2011 젊은 안무가 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를 협력 예술가로 내세운 2011 아비뇽 페스티벌은 그 때문인지 예년에 비해 무용 공연을 큰 비중으로 다루었다. 이는 음악가 출신 연출가 크리스토프…

코뿔소 되기, 혹은 되지 않기의 어려움

한불합작공연 코뿔소 공연 보고서 이오네스코(Eugène Ionesco, 1909~1994) 탄생 100주년을 맞은 지난 2009년, 한국에서도 그의 연극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었다. 크고 작은 프로젝트를 통해 많은 작품이 무대에 올랐고, 소위…

죄 없는 눈처럼, 오고 가는 빛그늘

국립극단, 3월의 눈, 백성희장민호극장, 2011.3 눈이라는 것은 본디 죄 없음의 상징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주홍빛 같은 죄가 십자가의 대속으로 흰 눈보다 더 희게 되었다고 말하지요. 그러나 눈의 죄 없음은 그것의…

다시 연극이라는 미디어에 대하여

극단 성북동비둘기, 메디아 온 미디어,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1.3 이따금 고전 비극의 대사들을 되새겨 보노라면,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넘어 여전히 우리를 강렬하게 건드리는 그 말들의 힘 앞에 모종의…

혈관 속을 흐르는, 꽃이 되는 이름

극단 성북동비둘기, 혈맥,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2011.1 1947년과 2011년, 공교롭게도 같은 성북동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지하/땅굴이며, 공교롭게도 같이 흘러가는 처지. 그렇다면 원작과 이번 연극 사이의 차별성은 고작 시간적인 차원에서밖에 나타나지…

아비뇽의 여름, 그 황홀한 뒤섞임

Festival d’Avignon 2010 아비뇽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교황청이 갖는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그 곳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장소이자, 여타의 의미들을 뛰어넘어 다만 그 육중함으로 현존하는 신비의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막 같은 그들의 아픔 – 고아뮤즈들

극단 프랑코포니/게릴라극장, 고아뮤즈들, 게릴라극장, 2010.2-2010.3 이미지와 서사 ― 드라마의 귀환 ‘텍스트에서 무대로’의 연극적 전환은 20세기 초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진행되어 온 커다란 흐름이다. 그리하여 이른바 ‘포스트드라마 연극’이란 것에…

허깨비 같은 무대와 인생에 대하여

극단 동, 비밀경찰,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2010.1 연극 자체로서의 연극 한 지면을 통해 연출가가 밝혔던 바와 같이, 이번 극단 동의 은 명백히 원작인 고골리의 보다는 메이어홀드의 그것에 더 가까운…

흑백사진

마뜨료쉬까라고 했다. 몇 해 전 긴 여행에서 돌아온 친구가 둥근 나무 인형을 내밀며 뱉은 그 이국의 발음이 유달리 귓가에 맴도는 밤이 있다. 팔도 다리도 없이 얼굴과 몸통으로만 이루어진…

인생의 효과 – 세르쥬의 효과

비바리엄 스튜디오, 세르쥬의 효과, 명동예술극장, 2009.11 지난 11월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던 비바리엄 스튜디오의 연극 는 사실상 매우 교묘한 메타 연극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숫기 없고 독특한 성격의 세르쥬에게…